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시작하며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인천의 독립운동, 3·1운동 말고도 많아

일본 제국주의(이하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한 3ㆍ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했다. 또, 3ㆍ1운동을 토대로 설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역시 지난달 11일 100주년을 맞이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3ㆍ1운동의 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돼있다. 3ㆍ1운동이 있었기에 임시정부 수립이 가능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노령 임시정부, 한성 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로 나뉘어 출발했다. 특히, 인천은 한성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이 깊다.

한성 임시정부는 노령 임시정부(연해주 소재 대한 국민의회, 1919.3.17.)와 상해 임시정부(1919.4.11.)보다 다소 늦게 수립되긴 했지만, 두 임시정부에 비해 국민대회(13도 대표자대회) 등의 정식 절차를 거쳤고, 한반도 안에서 수립됐다는 점에서 가장 정통성이 높은 임시정부로 꼽힌다. 한성 임시정부가 있었기에 1919년 9월 세 임시정부가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고, 3ㆍ1운동의 정신이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인천에서 일어나고 전개된 독립운동은 여전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나마 3ㆍ1운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 각국공원(현 자유공원), 문학동, 월미도, 영종도, 황어장터(계양) 등 여러 곳에서 운동이 전개됐다.

화도진도서관의 자료에 따르면, 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는 3·1운동에 참여하며 동맹휴학해 등교를 거부했고, 3월 9일에는 각국공원에서 기독교 신자와 청년학생들 3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강제 해산됐다.

3월 24일에 부평에서는 장날을 이용해 대규모 만세시위가 진행됐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 5~6명이 생기기도 했다. 이후 이 운동이 소래면과 계양면으로 번져 수백 명이 소래산에 불을 놓고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 시위가 도화선이 돼 강화ㆍ김포ㆍ부천이 서로 연락하며 만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부평에서는 3월부터 5월까지 6회에 걸쳐 950여 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이중 52명이 부상을 당하고 98명이 검거됐다. 인천 전체에서는 3월부터 5월 사이에 8회에 걸쳐 900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인천의 항일독립운동사 여전히 수면 아래에
 

임갑득 지사. (자료제공 인천역사문화센터)

인천의 3ㆍ1운동은 그나마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는 수면 아래에 있다. 인천에서 독립운동은 3ㆍ1운동에만 머물지 않는다. 항일운동은 노동운동과 소년운동, 청년운동 등 다양한 계층에서 일상적으로 전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일제가 일상적으로 감시했거나 체포한 독립운동가’를 정리해 놓은 ‘일제감시 대상 인물카드’를 보면, 인천지역 인사는 98명이다.

일제가 감시 대상으로 등록한 인사들은 일반 범죄가 아니라, 치안유지ㆍ소요ㆍ보안법 등 독립운동과 연관한 활동으로 체포된 이들이다. 거주지가 현재 인천시에 속하는 인사만 98명에 달한다.

이중에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명성을 얻은 이승엽과 같은 거물급 인사부터 인천공립보통학교 만세 시위를 주도해 1996년에 애족장을 받은 김명진 지사(1900~1965), 또 이 카드 외에는 행적을 찾을 수 없는 인사까지 다양하다.

나이도 10대부터 다양하다. 체포ㆍ투옥된 시기도 다르다. 거주지 기준이니 인천 출생이거나 본적이 인천이면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사람까지 망라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여전히 수면 아래에 있어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가 감시한 15세 항일투사 임갑득 지사

일례로 인천 3ㆍ1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 중에 임갑득이라는 지사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제82호(1920.6.5.)를 보면, 1919년 3월 25일 인천 만세운동의 주동자 15명 가운데 한 명이다. ‘인천광역시사(2013)’에는 1919년 3월 30일 인천시내 상가 철시운동을 독려하는 편지를 작성해 배포한 인물로 나온다.

임갑득 지사는 1904년생으로 1919년에 15세 소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임 지사는 1904년 8월 3일 현재의 배다리 일대인 인천부 우각리(牛角里) 55번지에서 태어났다. 본적과 출생지, 거주지가 모두 같다. 체포 당시 직업은 여관조합의 급사로 나온다.

임 지사는 일제의 보안법 위반으로 1919년 7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같은 해 9월 27일 형기를 시작해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가 1920년 2월 27일 가석방됐다.

어떤 연유와 각오로 3ㆍ1운동에 적극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석방 이후 행적도 알려진 게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일제가 15세 소년조차도 징역형에 처해야할 정도로 우리 민족의 독립 열망은 뜨거웠다.

임갑득 지사와 같은 인사가 무려 98명에 달한다. 인천 출신이되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인사까지 고려하면 수백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물론 일부 창씨 개명 사례가 있어, 어쩌면 독립운동과 연관성이 적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천이 기억해야할 인사들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아울러 올바로 조명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기록을 살펴봐야한다.

인천의 독립운동 바로 알기
 

임갑득 지사의 조서. (자료제공 인천역사문화센터)

‘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를 보면, 수형복을 입은 초췌한 모습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인사들의 얼굴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3ㆍ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하는 지금, 15세 소년 임갑득 지사의 여린 얼굴과 18세 청년 김명진 지사의 굳게 다문 입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천투데이>는 98명 중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인사 60여 명의 삶을 언론에 기록으로 남겨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기여하고, 인천 독립운동의 역사를 재정립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인천의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한다.

‘일제 감시 대상 인물’은 나이뿐만 아니라 노동자부터 지식인까지, 사회주의자부터 민족주의자까지 계층과 이념적으로 다양하다. 독립운동이 전 민중적 차원에서 일상적으로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인천투데이>는 일제에 항거한 민초들의 삶을 기록하고, 나아가 최근 일부 복원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사의 일부를 차지하는 인천의 독립운동가를 수면 위로 올리고자 한다. 이는 인천의 독립운동 바로 알기의 시작이다.

[도움말ㆍ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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