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그림의 말들 - 파블로 피카소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반전(反戰)의 상징 ‘게르니카’

죽은 아이를 안고 우는 여자, 창에 찔려 비명을 지르는 말, 누워있는 시체, 무릎을 꿇은 채 절규하는 사람,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과 동물들. 이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 참혹하다. 흑백이라 음울한 분위기가 더욱 진한 이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최고의 걸작이라 불리는 ‘게르니카’다. 그림 위의 전등은 태양을, 바닥의 부러진 칼은 민중의 패배를 상징한다. 스페인 내전 시 게르니카 지역에서 벌어진 일을 소재로 했다.

1937년 4월 26일, 공화당의 반대파인 프랑코 정권의 요청을 받은 나치는 폭격기 24대를 동원해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무참히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주민 2000명이 넘게 죽거나 다쳤다. 애초 목적은 게르니카 주변의 다리와 도로를 파괴해 병력 이동과 군수품 보급에 지장을 주려함이었지만, 나치는 마을을 공격했다. 대부분의 남자는 전선에 투입된 상태라 마을에는 아이와 여자가 대부분이었다. 나치의 목적은 무차별 공격으로 공화주의자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독일의 무기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바스크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문화 전통의 중심지인 게르니카가 어제 오후 반란군의 공중폭격으로 완전히 초토화됐다. 폭격은 방어능력이 없고 전선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45분간 계속됐다. (중략) 그런가하면 전투기들은 밭으로 달아나는 주민들에게도 무차별로 기관총을 쏘아댔다. 이리해서 게르니카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런던 타임즈>

첫 영성체(피카소, 1885~6,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는 이 사실에 격노했다. 파리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할 그림을 의뢰받았던 피카소는 이 뉴스를 듣자마자 하던 작품을 멈추고 ‘게르니카’ 제작에 돌입했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그림은 이전에도 많이 그려졌다. 전쟁 장면을 재현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피카소는 각기 상징적인 조각조각의 그림으로 인간의 극단적 고통에 집중했다. 일곱 번의 수정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고, ‘게르니카’는 반전의 상징이 됐다.

“예술가는 정치적 존재인 동시에 처참한 상황이나 세상의 모든 역경과 기쁨에 공감할 줄 알고 자기방식대로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예술가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할 수 있으며 무슨 배짱으로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에 무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림은 결코 아파트를 치장하려고 그리는 게 아닙니다. 그림은 적에게 맞서서 싸우는 공격과 방어의 무기입니다.”(파블로 피카소)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이 그림을 당신이 그렸느냐’라고 물었다. 피카소는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라고 답했다. ‘게르니카’는 가로 776.6cm, 세로349.3cm에 달하는 벽화 크기의 대작이다. 이 그림은 ‘스페인이 민주화될 때 고국에 반환하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까지 뉴욕 현대미술관에 보관되다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14세에 ‘첫 영성체’ 그려…“타고난 화가”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 루이스는 아버지 성, 파블로는 어머니 성이다. 피카소는 어머니의 성만 따와 19세 때부터 ‘파블로 피카소’로 서명했다.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숨을 쉬지 않아 산파는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먼 친척뻘로 의사인 돈 살바도르가 살려냈다. 방법은 물고 있던 담배 연기를 아이 얼굴에 뿜은 것. 아이는 기침을 하며 살아났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행위이지만, 이 이야기는 피카소의 전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시립미술관 관리인이자 미술 선생님이었다. 무명 화가로 그림을 그렸기에 피카소의 재능을 누구보다 일찍 알아봤다.

그림에 필요한 기본을 아버지에게 배웠다. 피카소가 13세 됐을 때 아버지는 비둘기를 그린 캔버스를 피카소에게 넘겨주며 비둘기 다리를 그리게 했고, 이를 계기로 아버지는 모든 화구를 피카소에게 넘겨주고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 아들이 자신을 넘어섰음을 본 것이다. 화구를 물려받은 피카소는 기류를 탄 새처럼 날아올랐다. 어떠한 미술학교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프라도 미술관이 그의 학교였고, 그 곳의 그림들이 그의 스승이었다.

피카소는 14세에 ‘첫 영성체’라는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의 공식적인 대형 작품인 이 그림은 아카데믹한 종교화다. 1896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일급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됐다. 다음해 ‘과학과 자비’라는 작품으로 피카소는 마드리드 국전과 말라가 지역에서 각각 최우수상과 금상을 받았다. 바르셀로나도 마드리드도 그를 품기엔 좁았다.

“소년 피카소의 그림은 아이의 그림이 아니라 타고난 화가의 그림이었다.”(거트루드 스타인)

게르니카(피카소, 1937, 마드리드 소피아왕비 미술관)
한국에서의 학살(피카소, 1951, 파리 피카소 미술관)

큐비즘의 신호탄 ‘아비뇽의 여인들’

피카소는 어린 시절에는 성인처럼 그렸고, 말년에는 아이처럼 그렸다. 피카소 전시는 한국에서도 자주 열리는데, 그의 전시 때마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다. “저런 건 나도 그리겠다.” 그의 행로를 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는 라파엘로와 같은 고전적 그림들을 어린 시절에 섭렵했고, 그 위에 새로운 양식인 큐비즘을 탄생시킨 천재 화가다.

“나에게 회화의 목적은 움직임을 그리는 것도 움직이는 세계를 그리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회화란 오히려 움직임을 고정하는 일이다. 이미지를 고정하려면 움직임보다 더 멀리 나아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뒤만 쫓을 따름이다. 나에겐 바로 그런 순간만이 현실이다.”

르네상스 이래 원근법이 그림에 도입되면서 그림에서 깊이가 생겨났다. 소실점을 중심으로 원근을 나타내는 표현은 오랜 시간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이 나타났고, 세잔 이후로 그림을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것은 의미를 잃었다. 대신 ‘내가 어떻게 보는가?’라는 주관적 표현이 더 중요해졌다.

피카소는 원근법을 없앴다. 그리고 사물이 보이는 각도에 따라 보이는 단면을 분석해 평면적으로 캔버스에 펼쳐 놓았다. 초점 여러 개를 한 화면에 구성한 이것을 큐비즘이라 한다. 이 그림들이 어떤 면에선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큐비즘은 초현실주의와 가장 구별되는 점이다. 초현실주의가 무의식의 표현이라면, 큐비즘은 있는 사물을 해체하고 해체한 단면을 분석해 다시 구성한 것이다.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표현을 창조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영역을 넘어서야 가능한 일이다. 피카소의 이름 앞에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이렇게 큐비즘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작품이 그 유명한 ‘아비뇽의 여인들’이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26세에 그렸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내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릴 때 잘못 짚었다고 했지만, 어쨌든 나는 사람들이 내가 뭔가 짚기는 짚었다는 사실을 알게 만들었다. 나는 나중에 사람들이 내가 잘못 짚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리라고 확신했다.”

20세 이후 피카소는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서 주로 활동했다. 가난했던 타국 생활의 우울함과 매우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담은 청색시대를 지나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화사한 장미시대로 돌입한다. 그리고 연이어 큐비즘이 탄생했다. 그렇게 일찌감치 그는 성공가도에 올랐고 전 세계는 그를 주목했다.

‘한국에서의 학살’로 한국전쟁 참상 고발

1951년, 피카소는 다시 한 번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을 그렸다. 황해도 신천 지역에서 벌어진 대학살을 소재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그림의 왼쪽에 아이를 안고 우는 여인, 체념한 듯 눈을 감은 임신한 여인, 놀라서 달아나는 아이, 이 상황이 뭔지 모르고 흙장난 중인 아이가 있다. 오른쪽에는 벌거벗은 사람들을 향해 로봇처럼 서서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이 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여인들이나 투구를 써서 누가 총을 쏘는지 모를 군인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은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보다는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인간의 무자비함과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기 12시간 전까지 그림을 그린 피카소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 도자기, 판화 등 총5만 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끊임없이 익숙한 것에 대해 질문하고 새로운 시각을 추구한 피카소는 92세에 잠을 자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가능하면 사람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리고,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유별나게 그리려 애쓴다. (중략) 내 작품에 산재한 요소들은 사물을 전통적 회화의 눈으로 보는 데서 출발하긴 한다. 하지만 표현 방식이 예상을 벗어나고 안정감을 흔들어놓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참고서적]

파블로 피카소 | 인터발고 지음, 정재곤 옮김 | 마로니에 북스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 피카소 무한한 창조의 샘 | 프란체스코 갈루치 지음, 김소라 옮김 | 마로니에북스 

창조자 피카소 | 피에르 덱스 지음, 김남주 옮김 | 한길아트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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