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추억이 그리 많은 곳은 아니지만, 문득 고향처럼 그리워지는 장소가 있다. 동인천 배다리 헌책방 일대가 내겐 그렇다. 인천에 오래 살았으면서도 서른 중반에야 그곳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그 후로 몇 년째 달마다 한두 번은 간다.

책 향기 진한 ‘아벨서점’도 좋고, 고양이가 지키는 ‘달이네’ 책방도 사랑스럽지만, 그 동네에서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곳은 따로 있다. 배다리 마을 한가운데에는 너른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는 초봄부터 온갖 풀들이 자라기 시작해 한여름이면 무성한 풀숲을 이루다 가을엔 코스모스가 만개한다. 하늘이 아주 파랗던 어느 날 무심코 공터 옆을 지나다가 노란 석양에 멀리 집 담벼락이 물들고 진초록의 풀과 자그마한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에 완전히 압도됐다. 정돈되지 않은 나대지에 맘껏 자라난 꽃과 풀들이 매우 아름다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뒤부터 마음이 허전한 날이면 그곳, 그 장면이 떠오른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생태텃밭 또는 생태숲, 동네텃밭으로 부른다. 하지만 정식 명칭은 ‘산업도로 부지’이다. 인천시가 2007년에 8차선 도로를 놓겠다고 발표했다.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가 언제든지 놓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고개를 절로 흔들게 된다.

내가 이 공터를 아끼고 좋아하는 데에는 어린 시절 살던 동네를 떠올리게 한다는 감상적인 이유도 있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취향도 있을 테고, 12년 넘게 이곳을 지켜온 주민들의 노고를 응원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이런 사적인 것들을 떼어 놓더라도 이곳은 지켜야할 가치가 있다. 도시 생태계의 성숙한 진화 과정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도시에 살기 위해 진화 중입니다(메노 스힐트하위전 지음, 제효영 옮김, 현암사 펴냄)’에는 도시에서 마냥 힘들게 하루하루 버티는 것처럼 보이는 생명체들이 오히려 도시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해가는 과정이 나온다.

털 색깔이 어두운 회색 비둘기는 도시화가 덜 진행된 곳보다 대도시에서 더 흔히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도시의 중금속과 관련이 있다. 회색 깃털엔 멜라닌 색소가 많다. 멜라닌은 금속 원소와 결합하는 성질이 있어 체내에 유입된 중금속 오염물질을 깃털로 내보내는 방식으로 몸 바깥으로 제거하는 데 유리하다. 실제 실험에서도 어두운 색의 깃털에는 밝은 색 깃털에 비해 아연과 납 같은 중금속 물질이 축적된 양이 더 많았다.

도시의 빛과 소음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소음이 뒤섞인 도시는 소리로 소통하는 새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곳이다. 게다가 도시소음과 새가 내는 소리의 주파수가 겹칠 때 새들의 울음소리는 소음에 쉽게 묻힌다. 그런데 소음이 심한 곳에 사는 박새는 소음보다 음높이를 높여 그 문제를 해결했다. 빛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도 점차 줄어들지 모른다. “시골 지역에서 태어난 나방은 40퍼센트가 불빛을 향해 곧장 날아간 반면 도시 출신의 나방은 전체의 25퍼센트만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고 나머지는 풀려난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177쪽)

도시에 사는 수많은 생명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적응하고 진화하는 종에 비해 그렇지 못하고 사라지는 종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인간은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도시 진화를 일으키는 인간의 영향력을 조절해 생명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그가 첫 번째로 내건 해결책은 바로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녹지 공간이 도시 어디에서나 풍성하게 잘 자라는 식물들로 자연스럽게 채워지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훨씬 낫다. 즉 아무것도 심지 말고, 흙도 인위로 채우지 말고 그저 공간을 그대로 비운 채 도시 생태계가 자체적인 흐름에 따라 알아서 채워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300쪽)

나는 곧바로 배다리 공터를 떠올렸다. 동구청은 계절마다 잘 자라는 식물을 심고 갈아엎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생태계를 위해선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훨씬 낫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침 마을활동가들이 그곳에서 저절로 자라난 식물의 모습을 기록하고 이름을 찾아 주민과 공유하는 활동을 조만간 시작한다고 한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 마치 방치된 듯 보이는 땅도 어떤 생명에겐, 그리고 나 같은 인간에겐 기대어 살아갈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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