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나는 천상 ‘집순이’다. 집에 있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한 일주일 집 밖에 안 나가도 답답한 줄을 모른다. 실제로 무더위가 이어지던 작년 여름, 8일 동안 집안에서 에어컨과 선풍기만 붙잡고 살았다. 그나마 8일 만에라도 나간 건, 페이스북에서 본 ‘백종원 냉라면’이 먹고 싶어서였다. 콩나물이든 오이든 채소가 필요했는데 냉장고에 마침 채소가 똑떨어졌다. 잠깐 나갔다 오기만해도 온몸이 땀범벅이 되겠지만 그건 시원한 냉라면으로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그날 아삭한 콩나물이 든 냉라면을 먹으며 ‘백종원은 정말 맛을 귀신같이 만들어내는구나’ 하고 감탄한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지쳐 늘어져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운 건 무언가를 먹고자하는 욕구일 때가 많았다. 농담이 아니라 순도 100퍼센트 진심이다. 인후염을 심하게 앓
다가 겨우 다리에 힘이 좀 생겼을 때, 나는 며칠 전 크림치즈를 만들어보겠다며 사둔 우유와 요구르트를 떠올렸다. 혹여 우유가 상할까 싶어 후들거리는 다리로 오가며 우유와 요구르트를 섞어 발효기에 붓고, 다음날 팔다리가 쑤셔 끙끙거리면서도 발효된 우유를 면보에 걸러 꾸덕한 치즈 한 덩이를 결국 만들어냈다.

호기심 많고 식성도 좋은 내겐 맛있는 음식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힘이 된다.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것은 오래 기억하고 깊이 간직하고 싶은 법이다. 그래서인지 내겐 문득문득 떠오르는 음식에 관련한 추억이 꽤 많았다. 벌써 4년째 쓰고 있는 ‘사연이 있는 요리이야기’는 그 추억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것이다.

그 연재를 시작한 지 2년이 됐을 때 나는 한계에 부딪힌 느낌이 들었다. 글 40여 편을 쓰고 나니 그 많아 보이던 추억도 바닥을 드러냈다. 에피소드 위주의 글을 요리법 중심으로 바꿔야하나, 아니면 연재를 아예 그만둬야하나 나름 심각했다. 결정을 미룬 채 몇 달 동안 연재를 이어가다가 질문 하나를 맞닥뜨렸다. 나는 그 글로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가. 사실, 연재를 시작하기 전 물어야했을 질문이었다.

한참 답을 찾던 난, 슬며시 요리에세이를 쓰는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쓰는가. 도서관과 서점에서 음식과 요리를 주제로 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음식 없는 삶이란 가능하지 않기에, 음식과 요리는 역사, 철학, 과학, 문학, 사회학, 인류학, 심지어 스포츠까지 거의 모든 영역의 지식과 맞닿아 있었다. 이 넓고 깊은 사유의 공간에서 내 글은 어느 위치에 점을 찍을 수 있을까.

위대한 글을 쓸 만한 깜냥이 안 되니, 읽는 동안 작고 소소한 감정들을 떠올리게 하는 글, 그래서 옅은 미소를 짓거나 잠시 울컥하며 각자의 가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느끼게 안내하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피소드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고싶은 이야기와 감정에 좀 더 힘을 싣자고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또 반년이 지났다. 그사이 내 책꽂이에는 요리 에세이집이 잔뜩 늘어났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할 때면 잠시 숨을 고르며 그 책들을 펼쳐 읽는다. 얼마 전엔 눈물 나게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 담긴 책을 읽고는 가슴이 뛰어 어쩔 줄 몰랐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 ‘아, 나도 이런 글 쓰고 싶다.’

도무지 읽지 않을 수 없는 글들이 있다. 내게 강렬한 질투심과 수많은 좌절감을 안기지만 결국엔 그 글들이 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는 데 뒤바람이 돼 주리란 걸 알기에, 게다가 재미도 있고 깊은 감동과 울림을 주기에 결국엔 펼칠 수밖에 없는 책들. 내게 자극과 용기가 돼준 요리에세이집, 초라한 내 글과 비교될까 감춰두고 싶은 책들을 용기 내어 꺼내 본다.

#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펴냄

계산동 동네 책방에서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펴든 순간부터 머릿 속에 자석이 하나 생겼다. 책을 읽지 않을 때도 그 자석이 이 책의 문장들을 계속 끌어당기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이 호박씨는 내년 봄에 다시 텃밭 호박 구덩이에 심기겠지. 다시 호박꽃이 피고 여름이 오고…애호박은 다시 늙은 호박이 되고 할매들은 우리 안방에 둘러앉아 저렇게 호박뭉개미를 드시며 엄마를 칭찬하시겠지. 아아 아늑해라. 따뜻해라. 세상이 둥그스럼하게 줄어들더니 호박씨 속으로 슬쩍 밀려들어갔다. 그걸 보며 나는 스르르 풋잠이 들었다.”(65쪽)

흔히 음식 관련 글에는 재료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정보, 음식의 대가들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사람은 ‘엄마’이고 그다음은 이웃‘할매들’이다. 특별한 재료도, 산해진미도 없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과 흔한 재료들만으로 이토록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을까. 문장들은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하나도 슬프지 않은 대목에서도 나는 몇 번이나 울컥했다.

“생속의 반댓말은 썩은속이었다. 속이 썩어야 세상에 관대해질 수 있었다. 산다는 건 속이 썩는 것이고 얼마간 세상을 살고 난 후엔 절로 속이 썩어 내성이 생기면서 의젓해지는 법이라고 배추적을 먹는 사람들은 의심없이 믿었던 것 같다. 그렇게 조금씩 속이 썩은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먹는 것이 배추적이었다.”(17쪽)

저자에게 배추적은 아픔으로 속이 썩다 못해 내성이 생겨 의연해진, 특히 여자들의 음식이었다. 저자는 “여섯 살이 되는 순간 이미 어른들이나 아는” 그 맛을 알았다. “물론 스스로 터득한 것은 아니었고 속이 썩을 대로 썩어 있던 엄마에게 감염된 것이었지만!”(18쪽)

이 책의 저자 김서령은 여러 책을 펴낸 칼럼니스트이자 문장가였다. 이 책은 지난해 10월 저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가 생전에 음식과 관련해 썼던 글을 모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에 실린 글들이 그가 남긴 유언처럼 느껴진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길어 올린 사유는 뜻밖에 단순했다.

“언제부터 누가 왜 사느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맛보기 위해서 산다!이다. 오관을 거쳐 가는 모든 감각들을 생생하게 느껴보는 것이 곧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게 고통인지 쾌감인지를 굳이 분별하려고도 말고 지나가는 것을 그저 느끼기만 할 줄 알면 삶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중간 생략) 그것만 있다면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인간은 결코 가난할 수 없다. 흡사 희랍인 조르바처럼! 원래 그러라고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어낸 게 아니던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연을 충분히 누리고 음미하고 찬탄하라고!”(227쪽)

#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
| 히라마쓰 요코 지음 | 이영희 옮김 | 바다출판사 펴냄

본격 음식에세이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를 읽으며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감성을 그대로 느꼈다. 바쁜 일과를 마친 후 맛있는 안주가 나오는 작은 술집에서 맘 편한 친구와 마주 앉아 술 한 잔 나누는 것, 기차를 타고 떠난 출장길에 혼자 들어간 식당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는 것, 봄날 오후 공원에서 시원하게 술 한 잔 넘기는 것, 이런 것을 나는 도시감성으로 읽는다.

“빠꼿. 컵술 뚜껑이 열리는 명랑한 소리. 통조림, 양배추를 함께 늘어놓고 공원 벤치에서 어른의 피크닉을 시작한다. 기다렸습니다, 라며 컵술을 입에 대고 추르릅. 음, 맛있어! 단술이 입안에 흘러든다. 그 순간 훅 하고 몸의 중심이 이완한다.”(48쪽)

저자인 히라마쓰 요코는 식문화와 일상, 문학과 예술을 주제로 폭넓은 글을 쓰는 작가다. 일본에서 문학상을 몇 차례 받은 그는 ‘음식과 맛으로 사회를 읽어 내고 싶다’는 욕구를 토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요리글을 쓰다가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이 책을 펴든다. 경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맛의 표현을 음미하다 보면 마음이 든든해지고 생기가 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 불릴 만하다.

# 소중한 것은 모두 키친에서 배웠어
| 히야마 다미 지음 | 박정임 옮김 | 위즈덤하우스 펴냄

어렸을 때 유난히 손때 묻은 책이 한 권 있었다. 제목은 ‘알뜰생활교실’. 집안 살림 노하우들이 빼곡하게 적힌 책이다. 엄마는 그 책을 무척 아꼈다. 나 역시 살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 책을 들여다보는 게 재밌었다. 아마 책에 남은 손때의 절반은 내 손에서 묻었을 거다.

‘소중한 것은 모두 키친에서 배웠어’를 읽으며 엄마가 아끼던 그 책이 생각났다. 일본의 자연주의 요리 연구가 히야마 다미가 60여 년 동안 요리를 가르치며 얻은 지식과 지혜를 담은 책이다.

“레몬즙 등 감귤은 한 번에 짜내야합니다. 두 번, 세 번 짜다 보면 쓴맛이 나옵니다.”

“가지의 꽃받침은 말려두었다가 검은콩을 조릴 때 넣으면 색깔이 고와지죠.”

레몬즙을 짤 일도, 가지 꽃받침으로 콩을 조릴 일도 없지만 이런 정보들에서 나는 재미를 넘어 신비로움을 느낀다.

“아흔 살이 돼서야 알게 된 사실은 ‘맛있는 음식은 조금이면 충분’하다는 것. 일상적인 식사는 평범한 것이 좋습니다.”(42쪽)

이 진리를 몸소 깨닫기엔 난 아직 너무 어린 모양이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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