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축조 ‘인천내항 1부두’ 유네스코 문화유산 추진
백범 김구 축조 ‘인천내항 1부두’ 유네스코 문화유산 추진
  • 김갑봉 기자
  • 승인 2019.04.1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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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인천시민 준비 모임 열려
부산은 ‘북항 1부두’ 등재 추진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인천시민들이 인천항 내항 1ㆍ8부두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한수 인성여자고등학교 교사, 조용만 인문학네트워크 대표, 조남진 전 동산고교 교사, 최정철 인하대 교수, 고제민 화백, 양진채 소설가, 이희환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대표, 박상문 전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 회장 등은 18일 준비 모임을 열기로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강제 노역으로 축조한 일제강점기 당시 인천항 1선거와 현재 내항 1부두 선석(사진제공 화도진도서관)
백범 김구 선생이 강제 노역으로 축조한 일제강점기 당시 인천항 1선거와 현재 내항 1부두 선석(사진제공 화도진도서관)

백범 김구가 축조한 인천항 석축 그대로 남아 있어

내항 1부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감리서에 복역 중일 때 축조한 곳으로 유명한데, 당시 축조한 선석이 지금 1부두에 그대로 남아 있다. 아울러 내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하와이 동포들의 눈물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년 김창수(=김구)는 을미사변(1895년) 이듬해인 1896년 2월 국모를 살해당한 원한을 갚는다며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를 살해하고 붙잡혀 인천감리서로 이감됐다.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 황제의 칙령으로 집행이 정지됐다.

김창수는 1898년 3월 탈옥해 이름을 김구로 바꾸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연루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는데, 김구는 안중근과 사돈 관계였다.

김구가 인천항 축조 노역에 동원된 것은 인천감리서에 두 번째 투옥됐을 때다. 김구는 일제가 1911년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고, 1914년 인천감리서로 이감됐다.

이때 김구는 제물포 축항 공사장(현 인천항 내항 1부두) 강제노역에 끌려 다니며 고역을 치렀다. 인천항 제1선거 축조공사는 1911년 6월~1918년 10월에 이뤄졌으며, 갑문 폭은 18m로 4500톤급 선박 3척이 접안할 수 있었다.

김구는 1915년 가출옥 후 황해도 안악 동산평에서 농민계몽에 힘썼다. 그 뒤 1919년 3월 만세운동 이후 인천항에서 중국으로 밀항한 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시간이 흘러 인천항 내항 1부두가 완공됐을 때 일제강점기에 축조한 도크는 철거됐고 지금은 내항 전체가 하나의 도크로 통합됐다. 1부두에서 선박을 정박하는 데 사용했던 기둥과 계선주는 그대로 보존돼있다.

일제강점기 조성한 인천항 1선거(사진제공 화도진도서관).
일제강점기 조성한 인천항 1선거(사진제공 화도진도서관).

내항 1부두는 ‘대한민국 디아스포라’의 첫 출항지

내항 1부두는 한국 디아스포라(이민)의 역사이자, 이민 후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던 하와이 동포들의 눈물이 서려있기도 한다.

한인의 미국 이민은 1903년 1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도착하면서 시작했다. 한인들이 도착하기 전 일본인이 노동자의 80%를 차지했다. 이들이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주도하자, 백인 농장주들은 이를 약화시키기 위해 한국ㆍ필리핀ㆍ 포르투갈에서 노동자를 끌어오기 시작했다.

최초 이민자는 101명이다. 101명을 실은 이민선은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를 출발해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 이후 1905년 일본의 제지로 중단되기까지 총 7226명이 하와이로 떠났다. 대부분 20대 남성이었고, 이민이라기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떠났다.

초기 한인 사회는 여성이 없다 보니 1910년부터 한국에서 이른바 ‘사진 신부’를 구하기 시작했다. 사진만 보고 결혼한다고 해서 ‘사진 신부’라고 불렸다. 1924년 미국 이민법에 의해 한인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한국 여성 1000명이 하와이로, 115명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가정을 이뤘다.

한국 여성 유입으로 가정이 늘고, 2세들이 태어나면서 하와이에 한인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 그 뒤 미국 본토에서 일하면 하와이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1903년부터 1915년까지 1087명이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이렇듯 하와이 동포는 한국 이민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이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미국으로 망명한 이도 상당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541명이 학생 신분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ㆍ정치지도자로 부상했고,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하와이 동포들은 하루 60~70센트의 임금 중 20센트를 독립운동자금으로 기부했다. 상해임시정부 예산의 3분의 2를 하와이 동포들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동포들이 모금한 금액은 약 200만 달러로,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억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광복 후 학교 설립 등 사회복지사업을 도왔다. 대표적 사업이 인하대 설립이다. 인하대는 하와이 동포들의 성금과 한인 기독교학교 매각대금 등 15만 달러, 정부 보조금 6000만 환, 국민 성금 2774만3249환, 인천시의 토지 기부 등으로 설립된 학교로, 인하공과대학으로 개교했다.

인천항 내항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역사성과 현재 남아 있는 유구 등을 고려하면 등재 가치가 있다”며 “내항 1ㆍ8부두 개방과 더불어 문화유산 등재가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 인천항 내항 1부두 선석. 1선거는 1부두에서 8두까지 갖춘 도크로 확장됐지만 1선거의 석축은 1부두에 그대로 남아 있다(사진제공 화도진도서관).
현재 인천항 내항 1부두 선석. 1선거는 1부두에서 8두까지 갖춘 도크로 확장됐지만 1선거의 석축은 1부두에 그대로 남아 있다(사진제공 화도진도서관).

부산, 재개발 대상 ‘북항 1부두’ 원형 보존 등재 추진

부산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다. 부산은 북항 1부두(1912년 지어진 근대식 부두)의 원형 보존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하는 방안을 확정한 뒤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인천의 시민모임은 비슷한 시기에 축성한 인천 내항 부두 또한 세계문화 유산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시민에게 개방하기로 한 내항 1ㆍ8부두를 상상플랫폼, 수변공원, 원도심 개항장 등을 중심으로 한 체험형 해양ㆍ역사ㆍ문화관광지구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내항 1부두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모임 관계자는 “내항 1부두는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ㆍ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가치가 있다”며 “이는 내항 재개발이 역사ㆍ문화ㆍ체험ㆍ관광 자원 개발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