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창립 50주년 매출 3500배, 자산 4280배 증가
14분기 연속 영업흑자 불구 ‘오너리스크’에 무너져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4월 8일 새벽(한국시간) 미국에서 숙환인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올해는 대한항공 창립 50주년 되는 해이다.

고 조양호 회장은 1949년 3월 8일 인천에서 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조 회장은 1967년 경복고등학교, 1975년 인하대 공과대학 공업경영학과를 졸업 한 뒤 1979년 미국 남가주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조 회장은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1992년부터 대한항공을 이끌었다. 조 회장은 2003년 고 조중훈 회장의 뒤를 이어 한진 총수에 올라 본사를 김포공항 옆으로 옮기고 대한항공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총수 일가의 각종 ‘갑질’과 불법이 드러나면서 회사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고, 급기야 지난달 대한항공 주주총회 땐 주주들의 반대로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하며 27년 만에 등기 이사에서 물러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선구자…일생을 수송보국에”

인천국제공항 대한항공 정비 격납고에서 고 조양호 회장.

대한항공은 고 조양호 회장에 대해 “반세기 동안 ‘수송보국(輸送報國)’ 일념 하나로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이끄는데 모든 것을 바치고,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한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조 회장은 1974년 대한항공 입사 후 45년간 정비, 자재, 기획, IT, 영업 등 항공 업무에 필요한 실무 분야들을 두루 거쳤다.

조 회장은 1992년 대한항공 사장, 1999년 대한항공 회장, 2003년 한진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조 회장은 재직 기간 중 국적 항공사인 대한항공을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항공사로 거듭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 회장 재직 시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 회장은 국제 경쟁이 치열해지자 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SkyTeam) 창설 주도해 위기를 돌파했고, 1997년 IMF경제불황 때는 항공기를 매각한 뒤 임차하는 방식으로 유동성 위기를 극복했다.

조 회장은 또 1998년 IMF 불황이 정점일 때 유리한 조건으로 주력 모델인 보잉737 항공기 27대를 구매했다.

또한, 이라크 전쟁과 사스(SARS,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사태, 9ㆍ11 테러 등의 영향으로 세계 항공산업이 침체에 빠진 2003년 조 회장은 오히려 이 시기를 차세대 항공기 도입의 기회로 보고 에어버스 A380 항공기 등의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구매 결정이 훗날 대한항공 성장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조 회장은 대형항공사(FSC)가 점유하던 세계 항공시장에서 저비용항공사(LCC)의 성장을 내다보고, 지난 2007년 대한항공과 차별화된 별도의 저비용항공사 진에어를 설립했다. 진에어는 저비용 수요를 창출하며 국내 LCC 항공시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대한항공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이했다. 1969년 출범 당시 8대뿐이던 항공기는 166대로 증가했고, 일본 3개 도시 만을 취항하던 국제선 노선은 43개국 111개 도시로 확대됐다. 국제선 여객 운항 횟수는 154배 늘었고, 연간 수송 여객 숫자는 38배, 화물 수송량은 538배 성장했다. 매출과 자산은 각각 3500배, 4280배 증가했다. 한진그룹의 2세대에 해당하는 조 회장은 수성을 넘어 비약적인 발전을 일궜다.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항공산업 위상 드높여”

2017년 대한항공과 델타항공 조인트 벤처 조인식에서 고 조양호(오른쪽 네번째) 회장과 조원태(오른쪽 세번쨰) 사장

조양호 회장은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항공산업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조 회장은 ‘항공업계의 UN’이라고 불리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총회 의장을 맡는 등 핵심 적인 역할을 했다.

조 회장은 1996년부터 IATA의 최고 정책심의 기구이자 의결기구인 집행위원회(BOG, Board of Governors) 위원을 맡았다. 그 뒤 2014년부턴 집행위원 31명 중 11명으로 따로 구성한 전략정책위원회(SPC, Strategy and Policy Committee) 위원도 맡았다.

조 회장의 이 같은 활동은 2019년 IATA 연차 총회가 사상 처음 오는 6월 서울에서 열리게 되는 토대가 됐고, 조 회장이 총회 의장을 맡기로 했다. 하지만 갑자기 별세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조 회장은 또 세계 시장에서 국적항공사의 점유율 확보에도 기여했다. 2010년대 미국 항공사들과 일본 항공사들이 잇따라 조인트 벤처를 체결하며 인천공항의 환승 경쟁력이 떨어지자, 조 회장은 델타항공과 조인트 벤처를 추진해 돌파했다.

이는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게 했고, 인천공항의 환승 경쟁력은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는 인천공항이 지난해 국제여객 기준 세계 5위 공항에 랭크 되는 계기가 됐다.

“민간 외교관으로도 맹활약… 대한민국 국격 높여”

프랑스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훈하는 고 조양호 회장

조 회장의 외교관으로서 역할도 상당했다. 조 회장은 에어버스 구매를 계기로, 한-프랑스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 회장은 한·불(프랑스)최고경영자클럽 회장을 맡아 양국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을, 2015년에는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를 받았다.

조 회장은 또 몽골로부터는 2005년 외국인에게 수훈하는 최고 훈장 ‘북극성’ 훈장을 받기도 했다. 조 회장은 몽골 학생 장학제도 운영 등으로 한?몽골 관계를 협력 동반자로 확대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외에도 조 회장은 프랑스 루브르, 러시아 에르미타주, 영국 브리티시박물관 등 세계 3대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 서비스를 시작했다. 조 회장은 한국도 세계적인 문화 사업에 후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국가 위상도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후원했다.

“국가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평창동계올림픽 이끌어”

조 회장은 1970년 미국 유학 중 귀국해 입대한 뒤, 강원도 화천에 소재한 육군 제7사단 비무장지대에서 복무했다. 또한 베트남전쟁에도 11개월 간 파병됐고, 1973년 7월 36개월 만기 복무 후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대한항공은 조 회장의 이 같은 경험이 조 회장의 소명의식으로 이어졌으며, 지난 2009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를 맡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조 회장은 유치위원장 재임 기간인 1년 10개월 동안 50번에 걸친 해외 출장으로, 약 64만km(지구 16바퀴)를 이동했다. 이 기간 IOC 위원 110명 중 약 100명을 만나 평창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조 회장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12월 한국언론인연합회 주최로 열린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에서 ‘최고 대상’을 수상했으며, 지난 2012년 1월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중 첫째 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조 회장은 2014년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까지 맡아 직원들을 파견해가며 올림픽을 준비했다. 그리고 2018년 개최 당시에는 조직위원장이 아니었음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성공과 굴곡 속에 살았던 최고 경영자

2018년 대한항공 임직원 세미나에 참석한 고 조양호 회장.

조 회장도 만사가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20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한진해운은 경영인들의 잇따른 오판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다.

이에 조양호 회장은 한진해운 경영정상화를 위해 2013년부터 구원투수를 자처하고 1조 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했다. 또 조 회장은 한진해운을 살리기 위해 2014년 한진해운 회장직에 오르고, 2016년 자율협약 신청 이후 사재도 출연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채권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한진해운은 2016년 법정관리에 이어 2017년 청산됐다. 육?해?공 글로벌 물류 전문 기업 한진의 한 축이 무너졌고, 국제 해운시장에서도 한국은 위기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에서 물러난 것도 부당한 외압에 의해 타의로 물러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 회장은 박근혜 정부로부터 사실상 사퇴 압력을 받고 2016년 5월 조직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떠났지만 조직위에 파견된 한진그룹 직원들은 남았다. 조 회장은 이메일을 보내 “외부 환경에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당당하고 소신껏 행동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최대 위기는 내부에서 비롯했다. 2014년 큰딸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이 잠잠해질 무렵 지난해 조현민 전 전무의 ‘물벼락 갑질’과 부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의 ‘갑질’ 등이 국민의 공분을 샀고 사정 당국이 그룹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총수 일가의 밀수혐의와 조 회장의 횡령배임 혐의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한진 그룹은 최대 위기를 맞이했고, 결국 조 회장은 주주들의 반대로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했다.

대한항공은 14분기 연속 영업흑자를 기록하고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창출하고 있었지만, 조 회장은 자기 집안의 오너리스크를 해결하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대한항공의 지휘자... 별이 되어 하늘로 돌아가다

대한항공은 조 회장이 평소 시스템 경영을 강조했다고 했다. 최고 경영자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조율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 회장은 또한 항공사의 생명은 절대 안전이라며, 안전을 지상 목표로 현장을 강조했다. 아울러 최상의 서비스야말로 최고의 항공사를 평가 받는 길이라며, 고객 중심 경영에 중점을 뒀다.

대한항공은 조 회장이 해외 출장 시 수행 비서 없이 해외 출장을 다니며 서비스 현장을 직접 돌아보며 안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없는지 살폈고, 접객 현장에선 직원들의 생생한 의견을 들어왔다고 했다.

대한항공은 “조 회장은 평생 가장 사랑하고 동경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늘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조 회장이 만들어 놓은 대한항공의 유산들은 영원히 살아 숨 쉬며 대한항공과 함께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고 조양호 회장의 유족으로는 부인 이명희(전 일우재단 이사장ㆍ70)씨를 비롯해 아들 조원태(대한항공 사장ㆍ44)씨, 딸 조현아(전 대한항공 부사장ㆍ45), 조현민(전 대한항공 전무ㆍ36)씨 등 1남 2녀와 손자 5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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