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말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그림의 말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 문하연 시민기자
  • 승인 2019.04.0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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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연 시민기자의 그림의 말들 - 캐테 콜비츠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첫 번째 그림 속, 마른 아이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다. 한 구석에서 다른 아이를 안고 있는 아버지는 침울한 표정으로 침대 쪽을 바라보고 있다. 앙상한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는 괴로움과 좌절감에 머리를 쥐어뜯고, 뒤편의 방직기계는 스산함만 더하고 있다. 죽어가는 아이를 눈앞에 두고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독한 가난은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없다.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①빈곤(샌프란시스코 파인아트 뮤지엄).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①빈곤(샌프란시스코 파인아트 뮤지엄).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②죽음(샌프란시스코 파인아트 뮤지엄).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②죽음(샌프란시스코 파인아트 뮤지엄).

다음 그림에서 아이의 목을 조르는 죽음의 사신은 기어이 아이를 데려간다. 아이는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원망스러운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뒷짐을 진 채 아이를 내려다보는 아버지는 ‘잘 가’라는 작별의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얼음처럼 굳어있다. 어둡고 무거운 공기가 가득한 공간, 넋이 나간 채로 벽에 머리를 기댄 엄마는 이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다.

그 다음 그림에선 사람들이 모여든다.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서 죽어가는 이때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다.

이어서 사람들은 행진하기 시작한다. 하나는 둘이 되고 둘은 셋이 됐다. 주먹을 불끈 쥔 남자 뒤로 곡괭이를 든 남자, 도끼를 든 남자, 아이를 엎은 여자, 모두 결연한 표정으로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들은 살기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자본가의 집, 화려한 철문은 닫혀있다. 모여든 남자들은 문을 열기 위해 전력을 다하다. 여자들은 보도블록을 뜯어내 돌멩이를 나른다. 문은 열릴 생각이 없고, 엄마를 따라온 어린아이만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린다.

이 작품을 두고 벨기에 조각가 콘스탄틴 모이니르는 ‘이런 식으로 묘사된 여자들의 손을 한 점도 본적이 없다’고 했다. 여자들의 살기위한 몸부림은 적극적이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봉기는 수포로 돌아 갔다. 피해자는 희생자가 됐다. 시체들이 하나 둘 가난한 방직공의 집으로 옮겨지고 있다. 멈춰버린 기계 앞에는 이미 시신 두 구가 뉘어져있고, 그들의 머리맡에는 슬픔에 짓이겨진 여인이 웅크리고 있다. 두 손을 늘어뜨린 창백한 여인은 동료의 손에 들려 옮겨지고 있는 또 다른 시신을 바라보고 있다.

슬프게도 결말은 죽음과 다시 이들을 덮친 가난뿐이다. 하지만 콜비츠는 창과 문 사이에 희미한 빛을 그려 넣어 그들에게 아직 희망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빈곤, 죽음, 회의, 행진, 봉기, 결말, 총6점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캐테 콜비츠(1867-1945)가 제작한 ‘직조공의 봉기(1895-1898)’라는 판화 연작이다.

노동자의 삶이 보여주는 단순함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③모의(샌프란시스코 파인아트 뮤지엄).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③모의(샌프란시스코 파인아트 뮤지엄).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④행진(미시건대학 예술박물관).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④행진(미시건대학 예술박물관).

캐테는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위로 태어난 아이 둘이 어린나이에 사망하고 실제로는 네 남매 중 셋째로 자랐다. 아버지는 법관이었으나 세속적인 성공이 보장되는 법관직을 버리고 목수가 된 급진적 사회민주주의자였고, 어머니는 개신교 신학자의 딸로 학식이 깊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종교학과 사회학을 배웠다. 가정 형편은 부유했으며, 그가 열두 살 정도 됐을 때 아버지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미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만난 노동자나 선원, 농노들을 그렸는데 당시 프로이센에는 여성이 다닐 수 있는 학교는 없었기 때문에 주로 개인교습을 받았다.

17세가 되자 아버지는 그를 베를린에 있는 여자예술학교로 보냈다. 그의 스승인 카를 쉬타우퍼 베른은 그에게 회화보다 판화에 더 많은 재능이 있음을 감지하고 친구이자 판화가인 막스 클링거를 알려주며 판화를 권했다. 베른 또한 사회성이 강한 에칭 작업을 많이 했는 데, 이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그는 1889년경 막스 클링거의 저서 ‘회화의 판화’를 읽고 본격적으로 판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1840년 산업혁명으로 등장한 직조기계는 가내수공업을 하던 직조공들의 삶을 통째로 흔들었다. 기계로 짠 제품은 손으로 만든 제품들에 비해 생산비가 적게 들었고, 자본가들은 많은 이윤을 챙기기 위해 직조공들의 급여를 최저생계비 이하로 떨어뜨렸다. 독일 소도시 슐레지엔에서 이런 임금삭감으로 인해 직조공들이 굶어죽는 지경이 됐다. 이에 격분한 직조공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이 사실을 토대로 극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직조공들’이라는 작품을 써서 무대에 올렸다. 하우프트만과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었던 캐테는 1893년 이 작품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직조공의 봉기’ 연작 시리즈 제작에 들어간다.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⑤봉기(스팟 우드 갤러리).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⑤봉기(스팟 우드 갤러리).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⑥결말(스팟 우드 갤러리).
직조공의 봉기(캐테 콜비츠, 1895~98) ⑥결말(스팟 우드 갤러리).

연극 내용과는 다르게 이 판화작품 속에는 직조공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직조공들의 비참한 생활과 분노에 찬 저항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 현실의 문제점을 확실히 부각했다. 이 작품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형상화한 리얼리즘 예술의 본보기가 됐다.

1898년, 이 작품이 처음 베를린 미술대전에 출품됐을 때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 금상을 주기로 결정했으나, 황제 빌헬름 2세에 의해 거부당한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 혁명이래 정치ㆍ사회ㆍ예술적으로 변혁의 시기였다. 황제는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말만으로도 혁명을 찬양하는 것으로 간주해 이런 의미를 내포한 모든 작품을 ‘시궁창 예술’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전시는 성공했고, 이에 힘입어 캐테는 베를린여자예술학교로부터 강의 의뢰를 받는다. 이듬해 이 작품은 드레스덴에 전시돼 금상을 수상했고, 런던에서도 상을 받았다. 그 이후 또 다른 걸작인 ‘농민전쟁(1902-1908)’이란 연작(총7편)으로 그는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혁명적 예술가로서 입지를 굳힌다.

“나는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단순하고 솔직한 삶이 이끌어주는 것들에서 주제를 골랐다. 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부르주아의 모습에는 흥미가 없었고, 중산층의 삶은 현학적으로만 보였다. (중략)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이끌린 이유 가운데 동정심은 아주 작은 것일 뿐이며, 그들의 삶이 보여주는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작품 주제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대의를 위한 고귀한 희생과 예술가의 책임과 역할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캐테 콜비츠, 1942,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캐테 콜비츠, 1942,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

1891년, 그는 칼 콜비츠와 결혼하고 베를린에 정착한다. 칼은 의사로 평생을 의료보험조합에서 운영하는 무료진료소에서 빈민들을 치료했다. 캐테는 이곳에서 가난과 고통의 참상을 목격한다. 둘 사이에 아들 두 명이 태어났다. 캐테는 시사주간지 <짐플리시시무스>에 사회 비판적 작품들을 싣기 시작했다. 대도시 생활의 힘든 삶, 혼자된 여자의 고단함, 실직, 배고픔과 절망, 원치 않는 임신과 같은 불행을 그만의 섬세한 터치로 묘사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캐테의 두 아들은 전쟁에 지원한다. 칼은 반대했지만 캐테는 두 아들의 뜻을 존중했다. ‘칼은 국방부에 편지를 써서 그 아이를 전선으로 보내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려한다. (중략) 나는 그것을 자식을 둔 사람의 이기주의로만 생각했다.’ 얼마 후 캐테는 전장으로부터 통지서 한 통을 받는다. 캐테의 그날 일기장에는 통지서에 쓰여 있던 단 한 줄이 적혀 있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둘째 아들 페터(18세)의 죽음은 그를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대의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 그동안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였다면, 아들의 죽음으로 과연 고귀한 희생이란 무엇인지를 회의했다. 그는 오랜 시간 슬픔을 승화해 페터를 기념하는 조각 작품 ‘비통한 부모(1932)’를 만들고 반전운동의 하나로 전쟁 시리즈를 제작한다. 희생, 지원병들, 부모, 과부1, 과부2, 어머니들, 민중 등 총7편으로 만든 이 연작은 너무도 강렬한 슬픔이 뚝뚝 떨어진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절망이, 어머니의 심정이, 남편을 잃어버린 아내의 슬픔이 애가 끓도록 녹아있다.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나의 예술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 구제받을 길 없는 사람들, 변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동시대인들을 위해 한 가닥의 책임과 역할을 하는 것이다.’

1936년 나치는 그에게 어떤 전시도 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그의 예술혼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위대한 예술가는 오늘날 침묵을 선고받았지만 그 작품은 점점 극동에까지 퍼지고 있다. 예술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중국의 루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손자인 페터가 참전해 목숨을 잃었다.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손자의 이름도 페터라고 지었건만. 케테는 전력을 다해 마지막 작품을 만든다. 괴테의 글에서 제목을 따온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이게 곧 내 유언장이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전쟁에 반대한다!’처럼 간절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자 요구이다.”

판화 275점, 초상화 50여 점, 소묘 1300점을 남긴 캐테는 1945년 종전을 며칠 앞두고 눈을 감았다. 1951년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동베를린 뵈르터 광장 공원에 세워졌다.

[참고문헌] 캐테 콜비츠|캐테 콜비츠 지음, 전옥례 번역|도서출판 운디네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