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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근처에 사시는 엄마와 같이 산책을 하고 막 헤어지려는 참이었다. 엄마가 작은 가방에서 뭔가를 부스럭거리며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김 볶은 거야. 너 바빠서 반찬 해먹을 시간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너무 바쁜 척, 엄살을 부렸나 보다. 얼마 전엔 카레를 1인분 씩 봉지에 담아주며 냉동실에 얼려 놓고 꺼내 먹으라더니 이번엔 볶은 김이다. ‘그 정도로 바쁜 건 아닌데’ ‘그냥 엄마 드시지’ 여러 가지 대답이 떠올랐지만 별말 않고 받아왔다. 혼자 집에 오는 길, 오래전 추억이 생각났다.

볶은 김은 내가 중학생일 때 엄마에게 알려준 반찬이다. 한 친구가 자주 싸 오는 도시락 반찬이 참 신기했다. 분명 기름을 발라 구운 김인데 우표처럼 네모나게 잘라져 있었다. 친구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작게 자른 김을 넣어 볶다가 소금을 뿌리면 된다고 했다. “김을 굽는 게 아니라 볶는다고? 정말?” “응, 엄마가 하는 거 봤어. 어렸을 때부터 만날 먹었어.”

나는 엄마에게 이 이야길 전했다. 나처럼 엄마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김이 얇고 납작한데 볶일까? 잘 안 될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엄마는 한 번 해보고 난 뒤 신세계를 만난 듯 좋아했다. “신기해. 맛은 구운 김이랑 똑같은데 만들기는 훨씬 편해.” 그날 이후로 엄마는 더 이상 번거롭게 석쇠에 김을 굽지 않아도 됐다.

볶은 김 말고도 그 친구의 반찬은 뭔가 달랐다. 바쁜 와중에 후다닥 만든 느낌이었다고 할까. 계란말이가 도시락 반찬의 절대 강자이던 시절, 그 애는 몽글몽글 흐트러진 계란 볶음을 싸 왔다. 이것이 ‘스크램블 에그’라는 걸 그 애도, 나도 (어쩌면 그 애 엄마도) 몰랐다.

순정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 가녀리고 예쁘장한 얼굴에 늘 조용했던 그 애는 말이 없는 대신 편지 쓰는 걸 좋아했다. 어느 날, 그 애가 두툼한 편지를 내게 건넸다. “집에 가서 읽어야해, 꼭”

편지 속엔 그간 살아온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어렸을 때 아빠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자식 여럿을 키우느라 온갖 일을 해왔고, 지금도 아침부터 밤까지 고생한다고 했다. 이제 언니 오빠들은 다 컸고 자기 하나 남았는데, 엄마는 그 애가 고등학교에 가지 못할까 봐 늘 걱정이라고 했다. “나 고등학교에 꼭 가고 싶어. 나 좀 도와줘.” 읽다 울어버린, 첫 번째 편지였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중학생, 특히 여학생들을 모두 수용할 만큼 고등학교 수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정식 고등학교가 아닌 비인가 학교에 가야했다. 성적이 좋지 않았던 그 애는 어쨌든 학력이 인정되는 학교에 가는 게 소원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친한 친구 중 그나마 성적이 나았던 내게 손을 내민 것이다.

여러모로 부족한 나였지만 그래도 그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연합고사를 불과 두세 달 앞둔 가을, 빈 교실에 남아 애쓰던 그 애와 내가 떠오른다. 나는 그 애에게 별 도움이 되진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 애는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그 소식을 전하며 친구는 무척이나 환하게 웃었다.

그 애의 엄마도 그날 한숨 놓으셨을까? 각자의 부엌에서 김을 볶아 도시락을 싸던 그 애 엄마와 우리 엄마. 그 손길에 담긴 바람과 고민은 다르면서도 결국엔 비슷했을 것 같다. 어쩌면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이 김도 마찬가지 아닐까. 기대하고, 부응하느라 애쓰고, 때론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하며, 그래도 여전히 기대어 사는 게 삶이란 걸 이제야 조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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