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국가중요무형문화재 궁시장 기능보유자 박호준 선생
제대로 된 화살 하나 만들기 위해선 뼈를 깎는 인내 필요

[인천투데이 류병희 기자]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 송죽(松竹) 박호준 선생을 미추홀구 문학동에 위치한 인천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에서 만났다.

박 선생은 1944년 강원도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41년생이다. 예전에는 유아사망률이 높아 출생신고를 늦게 한 경우가 많았다. 3세 무렵 인천 계양구 병방동(당시 병방리)로 이사 오면서 인천에 터를 잡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궁시장 기능보유자 박호준 선생.

박 선생은 무형문화재였던 부친 박상준 선생에게 화살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아 2008년 5월에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2대에 걸쳐 궁시장 기능보유자가 되는 명예를 얻었다. 궁시장(弓矢匠)은 활(궁)과 화살(시)을 만드는 장인을 일컫는다. 박 선생은 ‘시장(矢匠)’이다.

집안이 화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조부 박희원 선생 때부터다. 조부는 조선 고종 때 무관을 지냈다. 당시 조부는 관에서 공급하는 화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그것이 시작이 돼 부친과 본인을 거쳐 지금은 아들 삼형제가 모두 기술을 전수받았다.

부친은 17세에 조부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1978년 인간문화재가 됐다. 작고할 때까지 70년간 화살을 만들었다.

박호준 선생은 15세 무렵 생계를 위해 부친의 일을 도왔다. 처음에는 하기 싫었다. 그러나 집안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돕기 시작했다. 16세 무렵에는 부평으로 집을 옮기고 지금까지 부평에 살고 있다.

“전통문화 관련 정책 오히려 후퇴”

박 선생은 인터뷰 첫머리부터 정부의 전통문화 계승과 육성 정책에 비판적 의견을 쏟아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더불어민주당에서 문화정책 관련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촉하기도 했으나 선거가 끝난 후에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고 실망스러워했다.

“전통문화 계승과 관련해 자문한다던지, 간담회 개최 등 말만 앞세울 뿐 실제 먼저 와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묻는 공직자들은 없었다. 때 되면 자리와 사람이 바뀌고, 그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의견 내고, 정책에 대해 말했는데 입만 아프다”라며 “누구를 위한 전통문화 정책인가? 최소한 현장의 애로사항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해야하는 것 아닌가? 변한 것은 없다”라고 낙담했다. 전통문화 관련 정책이 오히려 후퇴했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는 직계 가족들이 어느 병원을 가든지 의료혜택을 받았다. 전통문화 보존에 대한 대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재는 본인과 배우자만 그것도 65세 이상일 경우만 혜택을 준다. 극빈자들이 많아 의료혜택을 예전처럼 해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박 선생은 “예를 든 것이지만, 정책이 갈수록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면 젊은 사람 어느 누가 기술을 배워 이어가려고 하겠나? 또,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75세 정년과 명예보유자 전환, 전승 지원금 삭감 등은 무슨 발상인가”라고 성토했다.

“이곳 전수교육관도 50%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나머지는 중앙정부에서 부담해 조성됐다. 5년 된 것 같은데, 여기도 전기세ㆍ수도세 등을 내야 한다. 나오면 차비에 밥도 사먹어야한다. 주된 작업장은 집이다. 집에서 작업하는 것이 제일 편하다. 세 들어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여기에 와서 내 돈 쓰면서 있어야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쓴 소리를 냈다.

대나무를 다듬는 박호준 선생

“화살은 균형 맞아야 과녁으로 힘 있게 날아가”

우리나라 전통 화살에는 목전(木箭), 철전(鐵箭), 예전(禮箭), 편전(片箭), 유엽전(柳葉箭) 등 여러 종류가 있다. 화살은 모두 같은데, 촉만 달라진다. 화살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나무와 싸리나무, 철, 쇠심줄, 꿩 깃, 복숭아 나무껍질(桃皮), 민어 부레풀(아교) 등이 필요하다.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면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데, 유효 사거리는 150미터 안팎이다. 더 멀리도 날아가지만 멀리 높이 올라가는 것은 신호용이나 통신용으로 적합하다.

화살은 사용하는 사람의 몸에 맞게 제작한다. 체형과 신장, 몸무게, 힘 등에 따라 화살의 길이와 무게 등이 달라진다.

활과 화살은 인류가 사냥을 시작하면서 생계에 가장 유용한 도구였다. 그리고 전쟁용으로 개량돼 인명 살상에 치명적 무기가 됐다. 돌과 청동, 철로 화살촉을 만들었고 폭약을 달거나 불을 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또, 소리를 낼 수 있는 통을 달거나 서신을 부착해 근거리로 쏘아보내기도 했다.

박 선생은 “화살을 만드는 것보다 재료를 구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다. 선생은 매해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충남 대산이나 남해 등지로 적합한 대나무를 구하러 다닌다. 두께가 굵어도 안 되고 마디가 길어도 안 되고 너무 어리거나 3년이 넘어도 안 된다. 바닷가를 끼고 산을 등진 지형에서 자란 3년 미만의 해변죽을 주로 찾는다.

“1년생은 사람으로 치면 말을 잘 안 듣는다. 나이도 안 된 것이 키만 커서 제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한다. 곧게 잡아놓으면 되돌아간다. 3년 이상 자란 것은 고집이 있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철도 좀 들고 적당한 연령이 2년생이다”라고 말했다.

화살촉과 재료들
화살 꿩 깃

예전에 재료 구하러 다니다가 간첩으로 오인 받아 경찰서를 갔던 적도 있다. 박 선생은 “작업복 입고 밤낮없이 남의 집 울타리에 가서 기웃거리니 오해를 받은 것 같다”고 멋쩍어 했다.

힘들게 구한 대나무를 1년 이상을 말린다. 그리고 껍질을 벗기고 숯불에 구워 비로소 다듬는 작업에 들어간다. 화살은 대나무 마디가 세 개 있어야 무게균형이 맞고 잘 날아간다. 곧게 편 대나무의 앞쪽 상사부위는 손톱 마디 정도를 돌려 깎아 민어 부레풀을 바른 쇠심줄을 돌려 감고, 삶아서 말린 단단한 대나무를 끼워 앞쪽 충격에도 터지지 않게 한다. 또 금속 원통을 이어 붙여 화살촉을 연결한다.

시위에 끼우는 오늬부위는 단단한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손으로 잡는 부위는 복숭아 나무껍질을 말려 덧대는 작업으로 미끄러짐을 방지하고 화살이 터지는 것을 막아준다.

깃은 꿩의 날갯죽지에 박힌 것을 사용한다. 꿩의 깃은 화살이 올바로 날아가게 하는 가장 최적의 재료다. 깃도 한 번에 하나씩 붙여야한다.

대나무를 일직선으로 곧게 다듬는 데도 며칠이 걸린다. 화살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까다로운 작업을 연이어 할 수 있는 인내심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만들다가 하나라도 실패하면 속상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치 자식을 대하는 느낌이다. 제일 좋은 화살은 길이, 무게와 상관없이 사용하는 사람에게 맞는 화살이다. 또, 무게와 부피, 길이 등 균형이 맞아야 과녁으로 힘 있게 날아간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내와 기다림, 집중력 등이 조화를 이루고 균형이 맞아야 목표에 제대로 도달할 수 있다”

대나무를 다듬는 박호준 선생

“전시 소장용으로 전락…전승교육 이수자 없어 걱정”

박 선생은 “우리 전통의 활과 화살은 이제 소장용으로 전락했다”며 갈수록 쇠락하는 전통문화에 아쉬움을 표했다. 스포츠는 양궁이 차지했고, 국궁을 즐기는 사람들도 대량생산한 화살을 사용한다. 선생이 만든 화살을 소모품으로 사가는 사람은 없고 액자로 만들어 전시용이나 소장용으로만 사용한다. 이마저도 사가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박 선생은 씁쓸한 일화를 들려줬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화살을 사갔던 사람이 지금 나한테 와서 깃에 곰팡이가 생겨서 상했다고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수십 년 전인데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던 것은 속으로 기뻤으나 그냥 해달라고 하니 마음이 상했다. 또, 수년 전에 부평박물관에서 기증하라는 식으로 말을 해서 사서 가져가라고 했더니 반응이 없었다. 이에 앞서 수년 전에 부평구에서도 화살을 가져갔는데 물건 값을 반도 안 냈다. 이를 구청장실 옆 응접실에 걸어 놨다. 그런데 들리는 얘기로 부평박물관에 내 화살이 있다고 해서 알아봤더니 부평구청에 있던 것을 박물관에 가져다 놨다는 것이다. 이를 듣고 헛웃음을 친 적이 있다”

화살 액자(가로)

박 선생은 “이대로는 생계를 이어가기가 힘들다. 자식들에게도 기술을 전수해줬는데, 전업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다들 직장 생활하면서 주말이면 잠깐 작업실에 들려 만들고 있다”고 했다. 이어서 “삼형제인데 큰아들은 이미 20년 이상 기술을 연마했다. 자식이니까 한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앞으로가 걱정이다. 전통기술이 이어지지 않을까 고민이 많다”고 푸념했다.

만드는 과정이 힘들어 배우겠다고 간혹 오는 사람도 며칠 하다가 그만둔다. 앉아서 하는 작업이다 보니 박 선생의 무릎이 많이 상했다. 특히 발목과 복사뼈가 아파서 이제는 오래 앉아있기도 힘들다.

박 선생은 “예전에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많았다. 그럴수록 대를 이어 한다는 자부심과 궁시장 기능보유자로서 뛰어난 기술에 대한 명예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까스로 잡았다”고 한 뒤 “전통문화 보전과 관련해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한참 멀었다.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처럼 전통기술이 후대까지 잘 전수되기를 희망한다. 무형문화재를 지켜나갈 수 있게 관련 정책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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