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엄마 얼굴엔 좁쌀만 한 물사마귀 같은 것이 오돌토돌 나 있다. 10여 년 전부터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얼굴 전체로 퍼졌다. 딱 한 번 피부과에 갔을 때, 의사는 “없애더라도 다시 생길 것”이라는 말로 엄마의 치료 의지를 꺾어놓았다. “근질근질하고 지저분해 보이고…그래도 어쩌겠어? 죽는 병도 아닌데. 그냥 살지 뭐.”

그런데 최근 지인을 따라 잠시 들른 피부과에서 귀가 솔깃한 말을 들었다. 레이저 치료를 하면 몇 년은 괜찮을 거란다. 어쩌면 “다시 생긴다”와 똑같은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흔의 엄마에겐 완전히 다르게 들렸다. “몇 년 후면 여든인데 그때까지라도 좀 깔끔하게 살아야지. 그때 가서 또 나든지 말든지. 안 그래?”

며칠 후 엄마가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빨간 상처들이 얼굴에 빽빽했다. 치료하느라 꽤 아팠을 거 같다. 며칠 세수도 못하고, 그 얼굴로는 외출도 못하겠단다. 때마침 최악의 미세먼지가 불어 닥쳐, 엄마는 “핑곗김에 잘됐다”고 했다.

바쁜 일이 몰려 며칠 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목소리는 꽤 씩씩했다. 다만 장을 안 본 지 오래돼 냉장고에 먹을 게 없다며 저녁거리를 걱정했다. 냉장고엔 양배추와 묵은 김치 두 통만 있다는 거다. 아, 그 김장이 아직도.

ⓒ심혜진.

묵은 김치 두 통 중 한 통은 지난겨울 김장할 때 엄마가 내 몫으로 챙겨둔 것이다. 김장 직후부터 가져가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넉 달이 지나도록 그러지 못했다. 엄마집에 들를 때마다 가져오지 못할 상황이 생기기도 했지만 사실 내겐 그 김치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나는 김치가 반드시 밥상에 올라야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냉장고에 큰 김치 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김치는 가끔 먹고 싶을 때 한 봉지씩 사 먹는 게 내 생활에 맞았다. 엄마도 김치보다는 생채소를 즐겨 드신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엄마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이제 김장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먹을 사람도 없고.” “아냐, 김치가 있어야 찌개도 해먹고 김치라면도 끓여 먹지.” “옛날처럼 김치찌개 한 솥씩 끓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냥 먹고 싶을 때 조금씩 사다 드셔도 돼. 그게 힘도 안 들고 맛도 있어.” “김장해서 너도 한 통 줘야할 거 아냐.” “아냐, 난 김치 안 줘도 돼. 진짜예요.” “에이…그래도 김장을 안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하지.”

그 김장이 올해도 남았다. 분명 냉장고에서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고 있지만 “먹을 게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오니, 김치가 이 말을 들으면 무척 서운할 것 같긴 하다. 겨울이 채 지나기 전, 봄채소들이 서둘러 나올 무렵이면 김장은 벌써 한물간 취급을 받는다. 봄동 겉절이와 상큼한 냉이, 달래 무침 앞에서 묵은 김치는 빛깔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다. 봄볕이 환해질수록 거무튀튀한 김치로 젓가락이 갈 확률은 점점 적어진다. 세월 이기는 장사가 없는 건, 김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것 봐, 묵은 김치 얘기 나올 줄 알았어.” “아냐, 김치부침개 해먹지 뭐. 반찬도 없는데 잘됐어.” “그래요. 반죽에 건새우 다져 넣어 봐요. 훨씬 맛있어.” “그래도 나한텐 소중한 거다. 구닥다리 같아도 그렇게 살아왔잖니. 할 수 있을 때까진 할 거야. 나 아직 힘 있어!” 한참 다른 얘길 이어가다가 엄마가 말했다. “근데, 김장을 안 하면 겨울엔 뭘 먹나?” “아니, 엄마. 요즘 겨울에 안나오는 채소가 뭐가 있다고.” “그러게. 나도 좀 편하게 먹고 싶은 것 먹으면서 살고 싶다. 올해부턴 김장하지 말까 봐. 나중에 김치 많이 먹고 싶으면 그때 다시 하든지 말든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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