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라 변한 맥주의 위상

[인천투데이] 맥주 애호가가 늘어나고 맥주의 위상이 높아졌다. 가볍게 마시는 폭탄주 제조용 정도의 평범한 술로 치부되던 맥주가 이제 세련된 취향을 반영하는 술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수제 맥주 펍(pub)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다양한 수제 맥주를 마시기 위해 펍을 순례하는 이른바 펍 크롤링(crawling) 문화도 생겨났다.

맥주의 위상 변화는 드라마에서도 읽을 수 있다. 고종 황제 시절이 배경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미군 장교 유진 초이는 생명의 은인인 조선 도공에게 맥주를권한다. 달라진 맥주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조선 도공에게 권한 술이 와인이 아니라 맥주라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원래 맥주는 그 기원과 성격에서 막걸리와 매우 비슷하다. 둘 다 곡주이고, 노동할 때 피로를 덜고 에너지를 보충한다. 노동자와 농부의 술인 셈이다. 그러니 미군 장교가 조선 도공에게 권한 술이 와인보다는 맥주여야 제격이긴 하다. 노동자의 술인 맥주가 조선에 들어와 귀한 술 ‘양주’가 된 것처럼 맥주의 위상과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변했다.

세련되고 진보한 서구 문화의 상징

20세기 초 조선에서 맥주는 세련되고 진보한 서구 문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기에 근대를 지나며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이 개화한 취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막걸리보다는 맥주를 선호한 것은 당연하다.

우리 조상들이 마신 첫 맥주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우나, 일본탓에 개항했기에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맥주는 일본 삿포로 맥주였을 가능성이 높다. 삿포로맥주는 1869년 일본에서 최초로 맥주를 만든 회사다. 인천항은 1883년 개항했으니, 인천항으로 조선에 들어온 첫 일본 맥주가 삿포로였을 가능성이 높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일본의 대일본맥주와 기린맥주가 각각 조선맥주와 소화기린맥주를 영등포에 설립해 맥주를 생산했다. 해방 후 1951년에 두 맥주회사는 민간에 불하돼 동양맥주(현 오비맥주)와 조선맥주(현 하이트맥주)로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르렀다.

조선에서 맥주를 만든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럽 맥주와는 차이가 있다. 보리로 만든 술을 맥주로 규정한다면, ‘조선왕조실록’에 보리를 사용한 술에 관한 기록이 있으니 우리 조상들도 맥주를 마셨던 것은 맞다. 그러나 보리 몰트를 사용하는 유럽 맥주 양조와는 달리 동양의 맥주 양조는 몰트를 사용하지 않았고, 곡물도 보리보다는 쌀로 빚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유럽 맥주와는 차이가 있다. 유럽에서 보리로 맥주를 빚은 것은 그 지역에 보리가 흔하기도 했고, 밀이나 귀리 같은 다른 곡물보다 보리가 더 술을 빚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쌀이 흔한 작물이었기에 쌀을 이용해 술을 빚는것이 보편적이었다.

맥주가 원래 갖는 노동주로서 기능과 이미지와는 달리, 조선에 수입된 맥주는 비교적 최근까지 일반대중에게는 매우 먼 술이었다. 1970년대까지 맥주는 막걸리나 소주에 비해 훨씬 비싼 술이었고, 맥주의 시장 점유율도 낮았다.

생맥주, 청바지와 더불어 젊음 상징

산업과 경제가 급격하게 발전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한 1970~80년대 들어와서 맥주가 일반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특히 생맥주는 1970년대 이후 청바지와 더불어 젊음을 상징하는 표상이 됐다. 1980년대 초반 동양맥주에서 ‘오비베어스’라는 브랜드로 생맥주 체인점을 시작하면서 생맥주 판매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맥주에 ‘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지만 효모가 살아있는 맥주는 아니고 살균한 맥주였다. 지금도 생맥주집의 맥주는 살균해효모를 죽인 맥주다.

1970~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호프집이라 불린 생맥주집에서 500cc잔을 들은 경험이 있을 것이고, 행사 뒤풀이를 의례히 생맥주집으로 간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호프집’이라는 명칭은 얼핏 맥주에 사용하는 호프(hop)를 의미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생맥주집이 호프집으로 불린 유래에 대해서 여러 설이 분분한데, 일반적으로 80년대 중반 동양맥주의 생맥주집 명칭인 ‘OB호프’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여기서 ‘호프’는 독일의 생맥주 판매장의 하나인 호프브로이(Hofbrau)에서 유래한 것으로 맥주 원료인 ‘hop’가 아니라, 독일어로 광장을 뜻하는 ‘hof’이다.

밍밍한 맛, 폭탄주 제조용으로

1980~90년대 맥주는 서민들의 일상을 파고든 음료가 됐으나, 여전히 소주나 막걸리가 가진 서민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며 와인이 중산층을 중심으로 새롭게 부상했고, 맥주는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음료가 됐다. 더 이상 젊은 문화의 표상으로서 이미지를 유지하지도 못했고, 그저 일상적이고 보편적이고 가벼운 술로 자리 잡았다. 특히 폭탄주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져나가면서 폭탄주 제조용으로 전락했다.

한국 맥주 위상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영국 매체였다. ‘한국 맥주는 북한의 대동강맥주보다 맛없다’는 평이 영국 매체에 실린 이후 한국 맥주는 최악의 맥주라는 인식이 퍼졌다.

한국 맥주가 맛이 없다는 인식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한국의 주세법상 몰트 함량이 10% 이상이면 맥주로 분류하기에, 맥주 제조사에서는 몰트 함량을 낮추고 옥수수나 쌀과 같은 첨가물의 비중이 높은 맥주를 주로 생산했다. 몰트 함량이 적다보니 아무래도 보리 몰트 특유의 풍미가 약한 밍밍한 맥주가 됐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맥주만의 특징은 아니다. 옥수수와 같은 첨가물을 미국 맥주도 많이 사용하고, 최근에는 몰트 함량을 높인 국산 맥주도 많기에 한국 맥주가 무조건 맛없다고 할 수는 없다. 밍밍하지만 시원한 한국 맥주 특유의 맛을 선호하는 사람도 많다.

수입·수제 맥주, 다양한 취향 저격

한동안 추락하던 맥주의 위상은, 다양한 외국 맥주가 수입되고 편의점에서 ‘네 캔에 1만 원’이라는 행사가 자리 잡으며 새롭게 조명 받았다. 수입 맥주가 다양한 맛과 저렴한 가격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면서 맥주의 위상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더불어 국산 맥주들도 100% 몰트 맥주나 에일 맥주 등의 개선책을 내놓고 있고, 개성 강한 소규모 양조장의 수제 맥주가 인기를 얻으며 맥주는 와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맥주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맥주를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맥주 관련 정보를 알고자하는 욕구도 높아지고 있다.

맥주의 이런 저런 면과 관련 정보를 알고 마신다고 해서 맥주가 더 맛있어지는것은 아니다. 기호품인 맥주는 개인 성향에 따라 선호도가 극명하게 갈리기도 한다. 기호품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이미지와 인식이 맛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맥주도 마찬가지여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여러 종류의 맥주를 제대로 구별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맥주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맥주를 선택하기 용이하고, 때로는 술자리에서 맥주에 관한 지식을 풀어놓으며 흥을 돋울 수 있다. 이왕이면 맥주에 대해 알고 마시면 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전영우는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직접 재배한 홉으로 맥주를 만드는 등, 맥주 세계에 흠뻑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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