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38
아나우, 채도(彩陶)의 중개지(仲介地)

[인천투데이 허우범 시민기자]

중세 ‘실크로드의 바그다드’
 

아나우 유적지 원경.

사막 속 황금빛 궁전이 있는 도시,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쉬하바드를 관통한다. 화려한 건물이 사라질 즈음 검문소가 나타난다. 마치 성곽 출입문마냥 도로 위에 세워진 대형 검문소에는 여지없이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있다. 아쉬하바드 궁전 출입자들을 철저히 검사하기 위해서다. 내가 탄 봉고차도 예외일 수 없다. 기사와 가이드가 뭐라고 설명했지만 통하지 않는다.

도시의 동쪽에 있는 아나우(Anau) 유적지로 향했다. 아나우는 페르시아어의 ‘아브이나우’에서 유래한 것으로 ‘새로운 물’이라는 의미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3000여 년경 인류의 흔적이 발견됐는데, 당시에는 유적지 주변으로 강물이 흘렀을 것이다.

아나우 유적은 비스듬한 구릉에 위치해있다. 이곳도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부서지고 기울어진 채 손만 대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하다. 건물 잔해와 벽돌들만이 이곳이 아나우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아나우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메르브, 테헤란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다.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충지다. 그런 까닭에 일찍부터 대상(隊商)들의 주요 거점도시가 됐다. 칭기즈칸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 중세 ‘실크로드의 바그다드’로 불릴 정도였다.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들은 1948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이처럼 폐허가 됐다. 이제는 잔해더미 사이 무성한 잡초만이 추억을 회상하는 벗이 돼줄 뿐이다.

사원에 새겨진 용무늬 문양.

하지만 아나우는 폐허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인류문명의 대동맥인 실크로드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4000년대, 초기 농경문화를 알 수 있는 유물들이 다량 출토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일 민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됐다.

유물 중에는 토우(土偶)가 많다. 특히, 지모신(地母神)으로 추정되는 여성 토우가 많다. 이는 다산(多産)과 풍요 등을 기원하는 종교적이고 주술적 대상물이다. 이 토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도 공통점이 많다. 선사시대부터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간에 문명 교류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채도의 길과 서역전래설

지진으로 무너지기 전 사원 모습.
지진으로 폐허가 된 사원 유적.

구릉 여기저기 잡초 사이로 흙더미가 보인다. 고고학적 발굴 흔적이 아닌 누군가가 파헤친 것들이다. 붉은 색의 흙과 함께 토기 파편들이 널려 있다. 채문토기(彩文土器)다. 아나우 유적의 대표적 유물인 채도(彩陶)의 흔적을 보니 가슴이 설렌다. 채도는 동서 교류의 중요한 유물로 이미 세계적 관심사가 됐다. 이곳에서 출토된 채도의 문양과 유사한 채도가 중국의 앙소(仰訴) 유적에서도 발굴됐기 때문이다.

중국 앙소 유적은 감숙성에서 발굴됐다. 기원전 3500년경 유물들이 출토됐다. 감숙성은 서역을 오가는 실크로드 관문이다. 아나우 역시 메소포타미아에서 카스피해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가는 길목이다. 인류는 고대로부터 이동과 교류 속에 발전해왔다. 이 과정에서 문화 교류는 필수적이다. 채도는 바로 선사시대부터 동서양의 문화 전파가 이뤄져왔음을 알려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를 일러 ‘채도의 길’이라고 한다.

중국은 이러한 채도의 서역전래설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황하 유역에서 자생했다고 주장한다. 중간 고리도 없고 문화적 배경도 다르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서역에서 시작한 채도의 편년은 기원전 7000년경의 이라크 자모르(Jamor) 문화, 기원전 5500년경의 이란 시알크(Sialk) 문화, 기원전 5000년경의 투르크메니스탄 아나우 문화처럼 점차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래됐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앙사오 문화는 기원전 3500년경으로 추산된다. 서아시아보다 2000~3000년 뒤진다. 이로 미뤄 봐도 채도는 서역에서부터 동진(東進)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서아시아의 유물들
 

중국의 채도에 영향을 준 아나우 채도.

대지진으로 무너진 사원 터는 돌무더기가 너저분하다. 이슬람 건축물은 대부분 식물을 문양화(紋樣化)한다. 안내인이 무너지기 전의 이곳 사원을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정문에 용무늬가 새겨졌다. 이를 두고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중국인들이 포로로 잡혀와 이곳에서 공사를 하며 비밀스럽게 새겨 넣었다는 이야기가 가장 신빙성이 높다.

아나우에서 출토된 채도를 보기 위해 박물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아쉬하바드에 있는 국립역사박물관은 그리스풍의 회랑이 좌우로 날개를 편 듯 웅장한 건물이다. 박물관 입장료는 10달러. 내국인과 비교하면 118배나 비싸다. 사진촬영은 별도로, 카메라 1대당 11달러다. 하지만 어쩌랴! 오기 힘든 나라에 보기 힘든 유물이니 지불하고 잘 살펴볼 수밖에.

동서 문명의 융합을 보여주는 헬레니즘 문화가 전시실에 가득하다. 수많은 유물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에로스상과 동물의 뿔로 만든 술잔인 ‘류톤’이다. 현대의 추상적 기법이 가미된 여신상들도 매우 독특하다. 모두 니사와 아나우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고대 서아시아의 빛나는 유물을 접하는 행복함이 비싸게 지불한 입장료를 말끔히 잊게 한다.

아나우에서 출토된 토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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