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처 ‘보상 지자체 업무’ 유권해석…11년 만에 시의회 조례 통과
안병배 시의원, "월미공원에 희생자 위령비도 세울 계획"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피해를 입은 월미도 원주민들의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인천시의회는 지난 15일 기획행정위원회를 열어 '인천시 과거사 피해 주민의 생활안전 지원 조례안'을 의결했다. 29일 본회의 의결로 확정된다.

시 조례 제정은 지난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인천상륙작전 때 유엔군 폭격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월미도 주민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권고한 지 11년 만의 일이다.

조례가 통과되며 시는 생활안정지원 심의위원회를 구성해 지원금 지급 방법과 규모, 지급 기간과 범위 등 세부 사항을 정해야 한다.

지난해 9월 13일 월미공원에서 열린 ‘인천상륙작전 원주민 희생자 위령제’에서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유가족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시사인천 자료사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했던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38선 이남의 인민군을 몰아냈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미군은 유엔군이 기습당할 수 있다며 항공기로 월미도 전역을 무차별 폭격했다.

이때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희생자 유가족들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폭격을 피해 육지와 연결된 다리 쪽 갯벌로 피신했는데, 미군 항공기는 이들에게도 기총소사를 가했다.

그 뒤 한국전쟁이 끝나고 월미도에 미군이 주둔했다. 그 다음엔 해군기지가 들어섰고, 이후 기지가 이전하며 인천시에 땅을 팔았다. 원주민들은 시에 땅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시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거부했다.

월미도 원주민들은 해방 후 일본 사람들이 남기고 간 집에 살았다. 이승만 정부는 ‘국세청에 3년간 사용료를 내면 땅 소유를 인정하겠다’고 했다. 원주민들은 사용료를 냈지만 2년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인천상륙작전 때 미군이 동사무소를 먼저 폭격해 토지장부가 불타버렸고, 주민들은 법적 근거를 마련할 수 없었다.

이렇듯 월미도 실향민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미군 부대가 주둔한 탓에 귀향하지 못했고, 1971년 이후엔 국방부가 군사기지로 사용한다고 해 귀향이 무산됐다.

인천시 역시 2001년 월미도를 매입해 공원을 조성하면서 사실상 월미도 실향민은 고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됐다.

안병배 시의원, "월미공원에 희생자 위령비도 세울 계획"

이후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전쟁으로 보금자리를 잃은 월미도 주민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고 권고하면서 새 국면이 열렸다.

이에 시의회는 지난 2011년과 2014년 관련 조례안을 발의했지만 매번 무산됐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 보상이 지방자치단체의 업무가 아니라 정부의 업무라는 이유였다.

그 뒤 올해 법제처가 시민을 위한 정책은 지자체의 업무라고 유권해석하면서 조례안 통과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법제처는 폭격으로 터전을 잃은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은 지자체의 업무라고 판단했고, 8대 시의회가 조례를 다시 발의했다.

조례를 대표 발의한 안병배(중구1) 부의장은 “10년이 더 넘는 시간이 흘러서야 드디어 주민들이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게 됐다. 억울한 시민을 돕는 일은 지자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며 "조례에 월미공원에 희생자 위령비도 세울 수 있게 했다. 위령비가 시 의무부담은 아니지만 시민들의 뜻을 모아 세울 계획이다"고 밝혔다.

한편, 29일 본회의 때 조례가 통과되면 이 조례로 보상을 받게 될 월미도 실향민은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지원금을 신청한 35세대로 파악된다. 한국전쟁 당시 월미도 가구수는 45세대 였으나 이중 생존자는 30여명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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