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영우의 ‘맥주를 읽다’ (1)
[연재] 전영우의 ‘맥주를 읽다’ (1)
  • 인천투데이
  • 승인 2019.03.11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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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와 사랑에 빠지다

[인천투데이] 맥주를 사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한국 맥주 맛이 별로인지라 폭탄주 이외 용도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도 했지만,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니 사람들은 맥주 맛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기에, 굳이 다양한 맥주를 찾아 마실 이유를 찾지 못했다.

맥주가 정말 맛있다고 처음 느낀 것은 일본 삿포로에서 맥주박물관을 찾았을 때다. 박물관을 견학하고 난 후 박물관에 딸려 있는 맥주원에서 마셨는데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하지만 귀국해 똑같은 삿포로 맥주를 슈퍼마켓에서 사서 마시니 그때 그 맛이 아니었다. 그렇게 맥주에 대한 고정관념이 굳어지나 싶었다.

일본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전시된 맥주들.
일본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전시된 맥주들.

맥주의 신세계에 눈을 뜬 것은 벨기에에서 맥주를 마시고 난 이후였다. 식사 때마다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나왔는데 이런 신세계가 있나 싶었다. 수천 종의 맥주가 벨기에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놀랐고, 수도원에서 만든 맥주가 그렇게 맛있는 것은 신의 손길이 닿아서인가, 싶기도 했다. 함께 어울린 벨기에 친구들의 맥주 사랑도 대단해서, 밤늦게까지 펍을 전전하며 흠뻑 취했다. 난생처음 맛본 맥주의 향에 반해 도수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이것저것 벌컥벌컥 마셔댔으니 취한 것이 당연했다.

벨기에 맥주를 마시고 난 후부터 맥주는 폭탄주 제조용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이 됐다. 사랑하니 알고 싶어졌고, 아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보게 됐다. 여행을 가면 반드시 현지 맥주를 찾아 마셔보고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찾는다.

맥주는 양조장 바로 옆에서 마실 때 가장 맛있다. 유통과정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많은 수입 맥주들이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지만, 제 맛을 느끼려면 현지에 가서 마셔야한다.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맥주들도 현지에서 마시면 더 맛있다. 동남아 맥주 중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비어라오’다. 라오스에서 이렇게 맛있는 맥주를 만든다는 게 믿기지 않는데, 맥주 맛과 경제력을 연관시키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버린다. 라오스 현지에서 마시는 ‘비어라오’는 정말 맛있다. 또한 우리네 댓 병 하나에 1000원가량으로 매우 저렴하다. 라오스에서 식사할 때는 의례히 물 대신 ‘비어라오’를 시켜 마신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아시아 맥주는 뭐니 뭐니해도 필리핀의 ‘산미구엘’일 것이다. 현지 정취의 영향도 있겠지만 필리핀 보홀 섬의 펍에서 마신 ‘산미구엘’은 환상적이었다. 한 병 값이 900~1000원이니 싸기도 하다. 베트남 사이공 맥주도 빼놓을 수 없다. 동남아 맥주 중에서 굳이 선호 순위를 매기라면 ‘비어라오’ 다음으로 ‘비아사이공(Bia Saigon)’이 으뜸이다. 캄보디아 ‘앙코르비어’나 태국의 ‘싱하’와 ‘창’ 맥주도 독특한 색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맥주들은 주로 라거 계열인데, 맥주시장의 70% 이상을 점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인기를 얻고 있는 수제 맥주에는 에일 맥주가 많은데, 개인적으로 에일 맥주를 더 좋아한다. 에일 중에서도 호프의 쓴 맛이 강한 인디아 페일 에일(IPA)은 수제 맥주의 대표격이다. 에일 맥주는 그 특성상 더욱 양조장 가까운 곳에서 마셔야한다.

‘유럽 맥주 견문록’이란 책이 있는데, 최상의 맥주 맛을 찾아 현지로 찾아간 기록이다. 이른바 ‘비어 벨트’라 불리는 맥주 생산지를 하나하나 밟아가며 영국, 벨기에, 독일, 체코, 네덜란드의 유명 양조장을 방문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공복에 맥주를 부어넣는 저자의 정성이 감동스럽다.

일본 삿포로 맥주 박물관.
일본 삿포로 맥주 박물관.

유럽을 술로 나누면, 크게 비어 벨트와 와인 벨트로 나눈다. 주로 북유럽 쪽이 맥주를 마시고, 프랑스와 남유럽(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이 와인을 마신다. 기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맥주 하면 흔히 독일을 떠올리고 독일 사람들의 맥주 사랑이 엄청나지만, 벨기에와 영국의 에일 맥주 사랑도 대단하다.

독일이 맥주 종주국 이미지를 가진 배경에는 ‘맥주 순수령’이 있다. 1516년 빌헬름 5세는 맥주 원료를 보리몰트, 호프, 물로 제한하는 법령을 공표했고, 이 법령에 따라 독일에서 제조되는 맥주는 다른 원료를 첨가할 수 없게 됐다. 이 법령의 목적은 빵의 원료인 밀로 맥주를 만드는 것을 금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덕분에 독일이 맥주 종주국의 이미지를 갖게 됐다. ‘맥주 순수령’을 지켜 재료를 엄격히 제한하는 독일 맥주보다는, 다양한 재료를 혼합해 수천 종의 맥주를 만드는 벨기에 방식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독일도 최근에는 다양한 재료로 맥주를 만들고 있다.

라거 맥주가 세계를 점령한 이유가 있고, 라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라거 맥주의 원조 격인 체코의 필스너 우르켈은 대표적인 라거 맥주이고 또한 훌륭한 맥주다. 필스너는 라거와 같은 의미인데, 필스너 우르켈은 오리지널 필스너라는 뜻이니 원조의 자부심이 배어있는 이름이다. 개인 취향에 따른 주관적 판단이겠지만, 라거 맥주는 아무래도 에일 맥주의 풍미를 따라가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라거 맥주는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에서 발효하는 효모를 사용하고 발효 과정에서 효모가 가라앉는 성질을 가졌기에 ‘하면발효맥주’라고 한다. 반면 에일 맥주는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서 발효하는 효모가 위쪽으로 떠오르는 성질을 가져 ‘상면발효맥주’라고 한다. 라거는 깔끔한 맛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긴 유통기간의 이점 등 여러 이유로 인해 맥주시장을 평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천편일률적인 맛의 라거 맥주보다는 다양한 풍미를 가진 에일 맥주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어떤 맥주이든 가장 맛있는 맥주는 역시 양조장에서 마시는 맥주다. 유명 양조장을 방문해 신선하고 맛있는 맥주를 마시면 좋겠으나 현실은 편의점 4캔에 만원 맥주이라 서글프다. 오늘도 마음만은 유명 양조장을 찾아 맥주 순례길을 떠난다.

※전영우는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직접 재배한 홉으로 맥주를 만드는 등, 맥주 세계에 흠뻑 빠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