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집 안에 달콤한 냄새가 가득하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냄비를 지키고 서 있은 지 한 시간이 다 돼간다. 그냥 먹어도 아까운 딸기로 잼을 만들다니. 딸기의 빛깔과 싱싱함에 현혹된 탓이다. 냉장고에 꽤 남아있는 줄 알면서도 탐스런 딸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상하기 전에 상태가 안 좋은 것들을 골라 잼을 만들기로 했다. 잼이 냄비 바닥에 눌어붙을 새라 숟가락으로 저으며 거품을 걷어내고 있자니, 아주 오래 전 어느 봄날이 떠올랐다.

마당 한 구석에 서서 인생 최대의 고민에 빠져 있었다. 마당이 넓은 그 집의 셋방으로 이사 온 뒤부터, 엄마는 우리에게 하지 말아야할 것들을 자주 되새겨주셨다. 풀 뽑지 마라, 꽃 꺾지 마라, 잔디밭을 가로질러 다니지 마라…. 그런데 도무지 지킬 수 없던 수칙이 있었으니 바로 ‘마당에 있는 건 아무 것도 손대지 말라’는 거였다.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마당을 배회하는 아이에겐 그곳이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찬 최고의 놀이터일 수밖에 없다는 걸, 엄마는 몰랐던 걸까.

ⓒ심혜진.

더군다나 그 집 마당엔 수국, 백합, 나리꽃 등 화초들이 자라고 있었고 커다란 꽃나무도 있었다. 꽃나무 아래 흙을 헤집어 놓거나, 접시꽃을 돌로 으깨 나온 진액을 담장에 칠하거나, 나리꽃 줄기에 까맣게 맺힌 씨앗을 하나하나 똑똑 떼어낸 것은 모두 나 혼자 한 일이었다. 아무도 직접 본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내가 한 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관심사가 다르고, 그 마당을 공유하는 아이 다섯 명 중 꽃나무에 관심을 가진 아이, 게다가 하지 말라는 짓을 기어코 하고야 마는 아이는 나밖에 없다는 걸 어른들이 몰랐을 리 없다.

그날은 꽤 일찍 마당에 나온 것 같다. 며칠 전부터 담장 옆 화단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별 것 없던 땅바닥에서 잎이 나고 줄기가 뻗고 하얀 꽃이 피고 지더니, 아주 조그만 연두색 동그란 것이 생겼다. 그 앞을 자주 서성이는 내게 엄마가 신신당부하셨다. “저거 딸기니까 절대로 건드리면 안 돼. 주인집에서 너 아주 혼낼 거야.”

시커먼 땅바닥에서 달콤한 딸기가 나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열매를 들여다봤다. 얼마 후 열매 끝이 정말 붉어졌다. 손톱보다도 작은 열매에서 정말 딸기 맛이 나는지 궁금해져 몸이 닳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곳에 갔다. 끝이 붉은 딸기가 더 많아졌다. 그동안 하지 말라는 짓을 무수히 했건만 이번엔 몹시 망설였다. 마당 꽃들은 어른들에게도 없어도 그만이겠지만 딸기처럼 아주 맛있는 건 차원이 다른 거였다. 딸기를 허락 없이 따먹는 건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쁜 짓이니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먹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나는 몇 번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붉은 기운이 강한, 이제 겨우 손톱만큼 자란 열매를 기어코 따고야 말았다. 그리고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아, 이 맛, 이 향기! 그 후로도 딸기를 몇 번 더 따먹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짧은 순간 스치고 지나간 그 맛과 향은 지금까지 생생히 남아 있다. 내가 딸기철마다 딸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건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누구도 가꾸지 않는 땅에서 빨갛고 달콤한 열매가 맺힌다는 걸 오감으로 확인한 어린 날. 그리고 어느새 그런 놀랍고 신비로운 순간들로부터 내가 한참 멀리 와버렸다는 걸, 딸기잼을 졸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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