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36)
쿤야 우르겐치, 쿠둘룩 티무르 미나레트

[인천투데이 허우범 시민기자]

쿤야 우르겐치의 흥망성쇠

쿤야 우르겐치(Kunya-Urgench)는 우즈베키스탄 서부 중심도시다. 투르크메니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다쉬오구즈(Dashhowuz)에서 1시간가량 달려 쿤야 우르겐치에 도착했다. ‘쿤야’는 투르크어로 ‘옛날’이라는 뜻인데, 그 옛날 실크로드의 중개지로서 전성기를 구가한 곳이다. 지금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영토이기에 우즈베키스탄의 우르겐치와 구별하기 위해 이렇게 부르고 있다.

쿤야 우르겐치도 고대 실크로드 대상(隊商)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도시였다. 이곳이 역사적으로 가치를 지니게 된 때는 아케메네스 제국 초기인 5세기다. 실크로드 길목이었기에 도시의 요새화가 먼저 이뤄졌다. 8세기 초에는 아랍이 차지했다. 이때부터 실크로드 교역의 교차로(交叉路)로 번성했다.

쿤야 우르겐치 원경.

12세기에는 호라즘 왕국의 거점도시가 돼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와 함께 중앙아시아 제2의 도시로 성장했다. 호라즘 왕조는 오트라르와 함께 쿤야 우르겐치의 지정학적 우위성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13세기 초 칭기즈칸의 중앙아시아 정벌로 하루아침에 폐허로 변했다.

칭기즈칸은 점령한 도시를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장인(匠人)이나 기술자들은 포로가 돼 몽골로 보내졌다. 젊은 여성과 아이는 노예가 돼 전리품으로 분배됐다. 나머지 사람들은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학살됐다. 과장되기는 했지만 몽골 병사 5만 명이 시민 100여만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도시를 감싸 흐르던 강둑을 터뜨려 도시 전체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병사들의 창칼을 피해 숨었던 자들도 결국 익사하고 말았다.

쿤야 우르겐치를 지키는 쿠둘룩 티무르 미나레트.

쿤야 우르겐치는 칭기즈칸이 파괴한 이후 다시 건설됐다. 옛날보다 더 번성했다. 실크로드의 요충지가 가진 장점 때문이었다. 14세기 아랍의 저명 여행가인 이븐바투타도 이곳에 들렀다. 그가 둘러본 당시의 모습은 어땠을까.

“이곳은 뛰어난 시장거리와 넓은 길거리, 수많은 건물들과 흥미로움을 끄는 곳이 많다. 그야말로 상냥하고 영광스러운 튀르크의 최대 도시다. 도시인들의 생활은 혼잡하고 격렬해 마치 폭풍우가 이는 바다처럼 보인다. 어느 날 나는 시장거리로 갔다. 중간쯤에 이르자 나는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뿐, 14세기 후반 티무르가 이곳을 점령한 뒤로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젖줄인 아무다리야의 물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길과 함께 거점도시는 히바가 됐고 그때부터 쿤야 우르겐치는 모든 이에게서 버려졌다.

폐허 위 몇 개의 유적이 뿜어내는 강렬함
 

미나레트에 조각된 이슬람 문장.

따가운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유적지로 들어선다. 드넓은 벌판에 탑 하나가 우뚝하다. 그 옛날 사막을 건너온 실크로드 대상들에게 희망의 등대였던 쿠둘룩 티무르 미나레트(=탑)다. 이 탑은 1388년에 완성됐는데 62미터로 당시 최고 높이였다.

7세기가 지난 지금도 60미터의 위용(偉容)을 자랑하며 넓은 벌판을 호령하듯 우뚝 서있다. 미나레트는 대상들에게는 등대였지만 죄인에게는 사형장이기도 했다. 훌륭한 유적마다 어찌 전설이 없으랴. 이곳 미나레트에도 슬픈 사랑의 전설이 있다.

유명한 건축가가 공주에게 청혼했다. 그러자 왕은 제일 높은 건물을 지으면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건축가는 공주와의 사랑을 꿈꾸며 최선을 다해 탑을 쌓았다. 드디어 탑이 완성됐다. 그러자 왕의 생각이 바뀌었다. 사랑하는 딸을 건축가와 결혼시키기 싫었다. 왕은 건축가에게 다시 조건을 내걸었다. “탑 꼭대기에서 떨어져 살아나면 결혼을 승낙하겠노라.”

천만부당한 일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건축가는 사랑을 포기하고 떠났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공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미나레트 위로 햇살이 따갑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색이다. 파랗다 못해 가슴이 시린 코발트색이다. 떠나간 건축가의 마음인가. 애끊는 공주의 마음인가. 아니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애태워하는 두 사람의 시린 마음인가.

쿠둘룩 티무르왕의 비였던 룰라벡하님 영묘.

미나레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건물이 홀로 외롭다. 쿠둘룩 티무르왕의 비였던 룰라벡하님 영묘(靈廟)다. 폭염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영묘 내부의 벽화들을 보고 있다. 벽면에는 이슬람 특유의 문양들이 빼곡하다. 특히, 영묘의 천장에는 우주와 영원의 무한함을 나타낸 조각이 선명하다. 마치 얼마 전에 만들어 놓은 것처럼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폐허의 벌판 위에 남은 단지 몇 개의 유적이 뿜어내는 강렬한 힘을 느낀다. 이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수많은 인류가 길을 내고 그 위에 문명을 발전시킨 실크로드의 전통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전통은 민족을 번영시키는 에너지다. 문화는 그 전통을 먹고 산다. 독특한 풍습과 전통을 가진 수많은 민족들이 모여 이웃의 그것과 교류하며 재창조한 문화는 생명력이 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만든 유적들이 깨어지고 부서진 채 뒹굴어도 당대의 삶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문화의 기원도 따지고 보면 이처럼 부단한 주변사회와의 교류에서 시작됐다. 도시 전체가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도 바로 이러한 전통의 힘이 살아 있기 때문이리라.

쿤야 우르겐치는 중앙아시아의 젖줄인 아무다리야가 물길을 바꿈에 따라 영화(榮華)도 끝이 났지만, 도시는 실크로드의 전성기를 잊지 않으려는 듯 아직도 고고(高古)하기만 하다.

우주와 영원의 무한함을 표현한 영묘 천장.
영묘에서 소원을 빌고 있는 이슬람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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