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세 마리의 까마귀
[세상읽기] 세 마리의 까마귀
  • 인천투데이
  • 승인 2019.02.0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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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세 마리의 까마귀. 시나 소설 제목이 아니다. 인천이 겪은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1949년 3월 31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천조사부에 무기명 투서 한 통이 접수됐다. 당시 송림동 226번지에 거주하는 전모 씨의 행적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 투서에 따르면,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로서 ‘소위 사상범이라 하는 조선애국지사를 검거ㆍ투옥ㆍ치사케’ 했으며, ‘조선어를 사용한 학생을 유치ㆍ투옥’하고, 인천상업학교 학생 27명을 검거해 충청북도 영동(永同)형무소에 넘겨 2년 가까이 수형생활을 하던 중 두 명이 옥사하게 했다고 한다. 이어서 “이 죄상을 양찰(諒察)하시옵고 삼천만 국민 앞에서 칼날 같은 벌과 깨끗한 처단이 있기를 삼천만의 1인으로서 앙망(仰望)합니다”라고 반민족행위 단죄의 열망을 담았다.

이보다 앞선 3월 17일에는 당시 인천부 재무과에 근무하던 최덕림(崔德林)이 반민특위 인천조사부에 “(이 사람은) 20여 년간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로 송이원(宋伊源) 및 권오연(權五然)과 결탁하여 참악한 일제정책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여온 다수한 혁명투사들을 잡아 가두고 두들기고 동포에 끼친 악질적 행위는 언어로서 다 표현할 수 없는 정도임으로 고문치사 악행 모함 기타 경찰 권세를 이용하여 우리 민족에게 금품 기타 재물을 착취하여 호의호식과 갖은 사욕을 감행한 자임으로 인천 부민이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라고 투서했다.

투서의 대상 인물은 전정윤(全正允)이다. 1949년 4월 27일 유동 23번지에 사는 이억근이 전정윤 사건의 증인으로 반민특위 인천지부에 출석해서 “그 당시 전정윤, 권오연, 송이원은 인천 청년이 가리켜 ‘세 마리의 까마귀’라고까지 불렀습니다”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전정윤의 악행 중 대표적인 것이 유천복 지사를 고문해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한 사건이다. 이억근 지사는 “소생이 그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을 마치고 귀가한즉 유천복이 서에서 석방되어 병석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방문한즉 처음에는 생명에까지는 별무(別無) 영향인 것 같이 보이더니 5, 6일 후에는 짐이 기울어져가며 유천복 자신이 소생에게 말하기를 ‘전정윤이란 놈 때문에 내가 죽게 되었다’고 비참한 말을 되풀이하고 되풀이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전정윤은 1937년 1월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유천복 외 4~5명을 수차 구속, 유천복을 3개월간이나 고문취조해 치사케 했으며(반민특위 범죄보고서), 이억근과 최덕림에게 ‘비행 고문’과 ‘물먹이 고문’을 했다.

반민특위의 피의자소행조서에는 “과거 고등경찰 근무 시 그의 직권을 악용하여 순진무구한 동족을 여지없이 유린하여 피를 빨은 흡혈귀라 하여 부민의 원성이 충천하고 있으며 단호한 처단을 요망하고 있음”이란 당시 평판을 적어놓았는데, 결론적으로 인천부민의 요망은 바람으로 끝나고 말았다.

전정윤은 1949년 9월 8일 재판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9월 22일 재판에서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감형돼 석방됐다. 권오연도 1949년 9월 23일 석방됐으며, 송이원은 최종 재판 결과조차도 확인하기 어렵다.

‘세 마리의 까마귀’는 인천의 수많은 애국지사들 가슴에 짙은 발자국을 남긴 채 반민특위의 법정은 물론 역사의 법정에서조차 단죄 받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세 마리의 까마귀’를 붙잡아 오는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