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가버나움(Capernaum)

나딘 라바키 감독│2019년 개봉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수갑을 찬 소년이 법정에 들어선다. 소년의 이름은 자인(자인 알 라피아). 소년교도소에 복역 중인 수인인데 자인이 선 자리는 피고석이 아닌 원고석이다. 대신 피고석에는 자인의 부모가 앉아 있다. “왜 부모를 고소했느냐”고 묻는 판사에게 자인은 답한다. “나를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자인은 왜 부모를 고소했을까. 레바논 여성 감독 나딘 라바키의 ‘가버나움’은 여느 법정 드라마처럼 검사와 변호사의 팽팽한 논쟁으로 극을 끌고 가는 대신,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했던 자인의 삶을 풀어낸다.

12세 소년 자인은 별 다른 직업도 없어 뵈는 아버지 셀림(파디 유세프)과 불법이든 합법이든 악착같이 살림을 꾸려가는 어머니 수하드(카우사르 알 하다드), 그리고 몇인지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로 줄줄이 딸린 동생들과 함께 낡은 집에서 산다.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았고 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자인은 밤낮 가릴 것 없이 생계를 위한 노동을 묵묵히 수행한다.

자인이 가장 아끼는 동생인 사하르(하이타 세드라 이잠)가 생리를 시작하자, 부모는 사하르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던 집주인 아사드(누르 엘 후세이니)에게 팔아넘기고, 자인은 집을 뛰쳐나온다. 갈 곳 없어 떠돌던 자인이 만난 이는 한 살짜리 아들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를 키우고 있는 싱글맘 라힐(요르다노스 쉬페라우). 라힐이 일하는 동안 요나스를 돌보며 그나마 안정된 생활을 하는가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라힐이 위조한 신분증의 체류 기간이 끝나 잡혀가면서 자인은 요나스를 부양해야하는 처지가 된다.

더 이상 요나스를 보살피는 게 힘에 부친 자인은 레바논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신분을 증명할 서류를 찾기 위해 뛰쳐나온 집에 다시 들어갔다가 아사드와 결혼한 동생 사하르가 어린 나이에 임신했다가 죽은 사실을 알게 된다. 화를 참지 못한 자인은 아사드에게 칼을 휘두르고,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온 대로 소년교도소에 수감된다.

자인이 발 딛고 선 땅은 학대와 멸시의 말들이 넘쳐나는 가난의 밑바닥이고, 존재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 불법의 공간이다. 자인과 가족들, 라힐과 요나스 모두 서류 없는 존재들, 난민 또는 불법체류자들이다. 그래서 인간임을 증명할 수 없다.

국경과 국적, 난민과 불법체류는 문명화된 인간이 발명한 인류문명의 산물이다. 그깟 서류가 무엇 이길래, 인간이 태어나느니 못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일까. 어린 자인이 더 어린 요나스를 안고 끌고 거리를 헤맬 때 이들을 보살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불법체류라는 약점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장사치나 꼬일 뿐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거지같아도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고 싶어한 나였지만, 자인이 마주한 현실 앞에서는 인간, 인류문명 자체에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영화 제목인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도시로 성경에서 예수가 멸망할 것이라 예언한 곳이다. 한마디로 생지옥. 인류문명이 만든 이 세계가 바로 생지옥임을 영화 ‘가버나움’은 보여준다.

자인을 연기한 자인 알 라피아는 실제 베이루트 거리를 떠돌던 시리아 난민이었고, 영화 속 자인처럼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정확히 몇 살인지 알지 못했다. 요나스는 나이지리아와 케냐 난민 부부의 딸 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이 연기했다. 라힐 역의 요르다노스 쉬페라우 역시 실제 아프리카 출신 불법체류자로, 촬영 도중 단속에 걸려 잡혀가기도 했다. 영화로 무참히 무너진 가슴이 영화보다 더한 현실에 더욱 미어진다.

난민 문제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불법과 합법의 딱지 붙이기를 논하는 것이 얼마나 반인간적 일인지, 영화 ‘가버나움’은 그 민낯을 보여준다. 난민, 불법체류자 딱지를 붙이고 있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야말로 가버나움, 생지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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