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35
오트라르, 칭기즈칸 유럽 원정의 시발점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 오트라르
 

칭기즈칸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오트라르 원경.

카자흐스탄의 서부에 있는 심켄트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80킬로미터 지점에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오트라르(Otrar)가 있다. 이곳의 원래 명칭은 ‘파라브’였다. 10세기부터 통상의 길목으로 떠오르면서 시장이 생겼고 도시로 번성했다. 당시 지리학자인 막디시의 기록을 보면, 오트라르에는 7만 명이 거주했고, 요새와 모스크는 물론 다양한 구역의 거래소가 있었다.

오트라르는 중세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이자 중앙아시아 호라즘 문명의 전형(典型)을 간직한 도시였다. 그러하기에 고고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호라즘은 ‘태양의 땅’이란 의미다. 1년의 대부분이 구름 한 점 없는 열사(熱沙)의 사막기후에 잘 어울린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문명이 발생했을까. 바로 천산산맥의 만년설(萬年雪)이 만들어낸 아무다리야라는 강이 흐르고 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榮華)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오트라르에 도착하자 실망으로 바뀐다. 중세 시기 거대한 도시였던 오트라르의 현재 모습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벌판이다.

칭기즈칸이 호라즘 지역을 정벌하며 본보기를 보여준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12세기 초, 칭기즈칸은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중앙아시아 지역을 장악한 호라즘의 왕 무함마드에게 사절을 파견한다. 동서방의 군주가 함께 평화를 추구하고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며 교역할 수 있는 협정을 체결한다. 협정이 체결되자 칭기즈칸은 무슬림 450여 명으로 구성한 교역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호라즘 왕국의 영내인 오트라르에 도착했다. 당시 오트라르의 총독은 이날추크였다. 그는 사절단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워 모두 죽이고 그들이 가져온 재물을 약탈했다. 사절단 중 한 명이 살아남아 칭기즈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칭기즈칸의 복수와 전쟁
 

거대한 크기의 목욕탕 터.

이 소식을 접한 칭기즈칸은 어떠했을까. 중세 이슬람 최고의 역사가인 라시드 앗딘은 이렇게 기록했다.

‘칭기즈칸은 자제할 수도 평정을 찾을 수도 없었다. 분노가 극에 달한 그는 홀로 언덕 위로 올라가 혁대를 목에 걸치고 모자를 벗은 뒤 얼굴을 땅에 댔다. 그는 사흘 밤낮을 신께 간구하고 울면서 외쳤다. “위대한 신이여! 오, 투르크와 타직의 창조주여! 이 분란을 일으킨 것은 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제게 복수할 힘을 주소서!”’

칭기즈칸은 무함마드에게 다시 사신을 보내 사건의 책임자인 이날추크 총독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무함마드는 칭기즈칸의 요구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사신 한 명을 살해하고 나머지는 수염을 모두 뽑아버렸다. 칭기즈칸에게 이제 더 이상의 협상은 필요 없었다. 오직 전쟁과 복수만이 있을 뿐이었다.

칭기즈칸은 오트라르 성을 포위했다. 성채는 견고했다. 성을 사수하는 군사 2만 명도 정예병이었다. 성을 포위한 지 5개월이 지났다. 오트라르를 사수하던 대장 카라차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든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병력을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와 몽골군에 투항했다. 하지만 그들이 맞이한 것은 죽음뿐이었다.

“너는 과거에 주군에게 은총을 입었는데도 그를 배신했으니 우리는 너와 한 마음이 될 생각이 없다.”

칭기즈칸의 복수는 이미 하늘에 맹세한 것이었다. 오트라르는 6개월 만에 함락됐다. 군사 2만 명이 항전했지만 결국 몰살됐다. 총독 이날추크도 칭기즈칸에게 잡혀왔다. 칭기즈칸은 즉시 그를 참살해 사절단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했다.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호라즘 왕 무함마드에게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몽골군은 오트라르를 알아볼 수 없게 파괴했다. 모든 건물은 부서졌고, 도시는 폐허로 변했다. 기술자를 제외한 모든 시민이 살해됐다. 급기야 호라즘 왕 무함마드는 두려움을 느꼈다. 죽음의 칼날이 자신을 겨누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다시 드러나는 오트라르의 전성기
 

오트라르성 안의 모스크가 있던 자리들.

해질 무렵의 오트라르는 더욱 황량하다. 서쪽 하늘을 온통 물들인 붉은 석양은 오트라르가 함락되던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최근의 발굴 성과들이 허허벌판에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도시의 전성기에 지어진 목욕탕은 아직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그 크기가 대단하다. 잘 다듬은 벽돌로 쌓은 유적지에는 커다란 온수 저장소와 스팀시설이었을 온돌 자리 등이 보인다.

무너진 성벽은 구릉이 됐다. 길게 이어진 구릉 끝머리에는 최근에 복원한 성문이 보인다. 설명 자료를 보니, 성문 높이만 22미터나 됐단다. 성문 앞으로는 폭이 5미터는 됨직한 해자(垓字)가 있다. 해자의 깊이는 그 이상이다. 당시 중앙아시아 최고의 철옹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문을 들어가니 몇 층의 언덕 위에 지어졌던 사원과 광장 터가 보인다. 맨 끝 높은 곳에는 궁전 터가 있다. 여기저기 기와와 토기 조각이 보인다. 금화와 보석 등이 이곳에서 발굴됐다고 한다.

티무르와 오트라르의 끈끈한 인연
 

오트라르성의 궁전 터.

오트라르는 칭기즈칸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복구됐다. 사방으로 오가는 대상(隊商)들이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한 까닭이다. 그 결과 다시 상업도시로 번성했다. 오트라르는 14세기 후반 티무르가 차지했다. 그의 정복전쟁은 오트라르가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수도를 사마르칸트로 옮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티무르와 오트라르의 인연은 끈끈하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15세기 초에는 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중국은 신흥국가인 명나라가 태동해 영락제가 통치하고 있었다. 티무르는 몽골의 땅을 수복하기 위해 천하무적의 정예군을 이끌고 동진했다. 하지만 추위로 군사들 태반이 쓰러지고 자신도 병이 들었다. 결국, 명나라 원정을 이루지 못하고 오트라르 궁전에서 죽고 말았다.

티무르는 눈을 감으면서도 원정을 중지하라하지 않았다. 대제국을 이루겠다는 꿈은 진정 꿈이었음을 죽는 순간까지도 알지 못한 것일까. 어느덧 석양도 식어가고 허허벌판에는 모래바람만 거칠다.

모스크 지역에서 발견된 우물.
해자를 갖춘 오트라르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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