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그림의 말들 - 툴루즈 로트레크

물랭루주에서의 춤

물랭루즈에서의 춤(1889~1890, 필라델피아 미술관)

빨간 스타킹을 신은 여인이 왼쪽 다리를 번쩍 차며 레이스가 달린 치맛단을 들어 올리고 캉캉 춤을 추고 있다. 질끈 묶은 머리, 수수한 드레스. 어딘가 모르게 촌스러운 이 여인은 남들이야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댄스 삼매경에 빠져있다. 그 앞에서 스텝을 맞추고 있는 중절모를 쓴 남자는 이 카바레의 댄스 스타 발랑텡이다. 어찌나 유연하고 춤 솜씨가 좋은지 ‘뼈 없는 발랑탱 씨’라고 불린다. 그리고 맨 앞에 분홍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보인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는 이 여인은 이곳이 어색하고 부끄러운 모양이다. 단정한 머리 위에 고급스런 모자, 하얀 밍크 목도리까지. 자태로 보아 귀족임에 틀림없다.

이 그림은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가 그린 ‘물랭루주에서의 춤’이다. 빨간 풍차라는 뜻의 물랭루주는 에펠탑이 세워진 해에 개장한 카바레다. 이브 몽땅과 에디트 피아프가 처음 만난 곳. 훗날 파리 사교계의 정점을 찍으며 돈과 권력이 모여들던 곳. 로트레크는 이곳 지배인과 매일 이곳에서 그림을 그릴 테니 매일 술을 마시게 해달라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날그날 본 것을 마치 일기를 쓰듯 드로잉하고, 때로는 그 드로잉을 바탕으로 작업실로 돌아와 작품을 완성했다.

이 그림의 오른쪽 끝에 있는 남자 네 명은 그의 친구들이고, 망토를 걸친 여인은 물랭루주의 메인 댄서인 잔 아브릴이다. 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인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로트레크는 ‘뼈가 없는 듯 유연한 발랑탱이 한 여자에게 춤 교습을 하고 있다’라는 메모만 남겼다.

이 그림을 반긴 사람은 물랭루주의 주인 조셉 올레르다. 그는 이곳을 서민들만을 위한 카바레가 아닌 귀족도 함께 즐기는 명소로 만들고 싶었다. 그가 만든 홍보 문구가 ‘사모님과 함께 즐기는 파리의 구경꺼리’인데, 그 문구와 이 그림은 잘 맞아떨어졌다. 올레르는 이 그림을 매입해 입구에 걸었고, 물랭루주는 사교계의 명소가 됐다.

귀족 집안의 장남과 농축 이골증

툴루즈 로트레크의 아버지는 ‘알퐁스 샤를 마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몽파’ 백작이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친사촌 사이인 ‘아델 조에 마리 마르게티 파티에 드 셀레랑’이다. 귀족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로트레크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부모의 근친혼 때문에 ‘농축 이골증’에 걸렸다. 농축 이골증은 상염색체 열성 질환으로 극히 드문 유전병이다. 다발성 기형과 함께 뼈가 잘 부스러지고 키가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당시 아무도 이 아이가 그런 병에 걸렸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1867년에 태어난 남동생은 1년도 살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떠났고, 둘은 결국 이혼한다. 로트레크가 네 살 때다. 로트레크는 어머니와 살았지만 아버지와 만나 승마ㆍ사냥 등을 즐겼다. 여전히 집안 소유의 대 저택이나 성에 거주한 로트레크는 병이 점점 발현돼 14세부터 지팡이 없이는 걷기 힘들게 됐다.

어느 날 거실에서 일어나려다 미끄러져 왼쪽 다리가 부러졌고, 이듬해에 또다시 낙상 사고로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 이후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았고, 격한 야외활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의 키는 152센티미터에서 멈췄다.

아버지는 이런 그를 수치스럽게 생각해 그를 보려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그의 병 치료를 위해 그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녔다. 이런 과정은 그와 어머니의 유대를 강화시켰고, 그는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의지했고 어머니는 그의 곁을 지켰다.

상업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물랭루즈의 포스터(1891)

이런 그에게 돌파구는 그림이었다.

“산다는 것은 충분히 슬픕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스럽고 즐겁게 나타내야하지요. 그것을 그리기 위해서 푸른색과 붉은색 물감이 있는 것입니다.”(툴루즈 로트레크)

그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화가인 프랭스토를 거쳐 제3공화정의 공식 초상화가인 레옹 보나의 제자가 된다. 그 이후 코르몽의 화실을 다니며 에밀 베르나르와 빈센트 반 고흐도 만난다. 그는 드가와 마네를 존경했고, 반 고흐와 일본 판화에 관심을 가졌다.

1887년에 고흐와 함께 전시를 한 로트레크는 1890년 브뤼셀에서 열린 ‘20인전’에 초대를 받아 출품하면서 친구인 고흐를 추천했는데, 이를 앙리 드 그루가 반대했다. 이에 격분한 로트레크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다른 이들의 중재로 결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가 고흐의 작품에 얼마만큼의 애정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1885년, 로트레크는 몽마르트에 거처를 마련한다. 몽마르트는 그에게 혼란과 매혹을 동시에 던져준 곳이다.

“사람들의 동정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몽마르트 언덕에 있을 때 더욱 불쾌합니다. 작은 결실이라도 얻고자 한다면 그런 동정을 피해야겠지요.”(할머니에게 보낸 편지)

1889년, 몽마르트에 물랭루주가 문을 열었고, 그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그는 ‘물랭루주의 화가’라 불리며 유명해진다. 그리고 이때 그린 명작이 바로 ‘물랭루주에서의 춤’이다. 이때까지 카바레 홍보포스터는 색채만 현란하고 그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로트레크는 물랭루주 홍보포스터를 제작했는데, 이 포스터는 상업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밑바탕이 됐다.

포스터 맨 위에 ‘물랭루주’라는 글씨가 세 번 연속 나온다. 치마속이 다 보이게 다리를 들고 있는 여인은 물랭루주 메인 댄서인 라 굴뤼, 어두운 실루엣의 남자는 뼈가 없다는 발라탱이다. 노란 덩어리는 가스등을 표현한 것이다. 물랭루주에 오면 라 굴뤼와 발라탱의 춤을 볼 수 있고, 가스등이 있으니 밤새 놀 수 있다는 뜻이다. 보통 여자들이 발목조차 보이지 않은 때에 치마를 번쩍 들어 올리는 캉캉 춤을 춘다는 물랭루주는 파리 사람들에게 매우 유혹적이었다. 이 포스터로 물랭루주는 대박이 났고, 로트레크는 유명해졌다.

이 포스터에 등장한 라 굴뤼는 ‘먹보’라는 뜻이다. 손님들의 술을 하도 많이 마셔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이곳에서 댄서로 전성기 몇 년을 보낸 그녀는 카지노에서 꽃을 팔았고, 레슬링 선수로, 조련사로 일하다가 말년에는 성매매업소 거리에서 청소 일을 하다가 외롭게 죽었다. 로트레크는 라 굴뤼와 잔 아브릴과 같은 무명의 댄서들을 그림에 담음으로써 쉽게 잊힐 그녀들을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물랭가의 살롱에서(1894, 알비시 로트레크 미술관)

로트레크를 사로잡은 또 하나의 주제는 성매매업소 거리다. 여인의 누드와 여자 동성애를 다룬 석판화 작품들을 모아 ‘그녀들’이라는 작품집을 냈는데, 주제를 대하는 방식 때문에 그는 비평가들과 대중의 비난을 샀다. 그는 성매매라는 주제에 대한 환상을 깨고, 도덕적 판단도 하지 않고, 어떤 장식도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

이 작품은 ‘물랭가의 살롱에서’이다. 성매매업소의 대기실 같은 곳이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주인 여자를 제외하곤 아무도 화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해답은 가장 오른쪽 끝에 잘린 여인의 자세에 있다. 그녀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서 있다. 성병 검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백신이나 치료약이 없던 당시에는 매독과 같은 성병이 확인되면 여지없이 거리로 쫓겨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했다. 그러니 표정이 어두울 수밖에. 그는 이러한 장면을 그림에 담았고, 그걸 보는 사람들은 불편했다.

지독한 알코올 중독과 매독에 걸린 그는 35세에 심한 섬망 증상에 시달려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면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았을 거’라던 로트레크. 그는 마지막 순간 어머니에게 “죽는 것도 굉장히 힘들군요”라는 말을 남기고 말로에 성에서 눈을 감는다. 37세였다.

그는 유화ㆍ수채화ㆍ일러스트 1300여 점과 드로잉 5000여 점을 남겼다. 어머니는 그의 작품들을 모아 그의 고향인 알비시에 기증했고, 그곳에 로트레크 미술관이 1922년 문을 열었다.

[참고도서]
- 로트렉, 몽마르트의 빨간 풍차(다빈치|앙리 페뤼소|강경)
- 로트레크, 몽마르트르의 밤을 사랑한 화가(마로니에북스|엔리카 크리스피노|김효정)
- EBS 서양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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