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최근 개봉한 영화 ‘리지’는 딸의 아버지 죽이기와 관련한 영화다. 리지는 명망 높은 보든 가(家)의 둘째 딸로, 재산을 상속하지 않고 자신을 내쫓으려는 아버지 앤드류와 갈등을 겪고 있다. 어느 날 브리짓이 새 가정부로 들어오고, 리지와 브리짓은 함께 글공부를 하며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된다. 재산 등의 문제로 리지와 앤드류의 불화가 깊어질 무렵 리지는 앤드류가 새로 들어온 가정부 브리짓을 강간한 것을 알게 되고, 머지않아 앤드류와 애비는 수차례 도끼로 찍혀 살해당한다. 리지는 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다.

이 영화는 1892년 미국 메사추세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했으며, 실제 사건에서 재판에 회부된 리지는 배심원 판결에 따라 무죄를 선고받았다.

리지를 범인으로 상정한 영화를 보며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딸의 아버지 살해는 어째서 반역이 되는가. 그리고 이는 다음의 질문과 연결된다. 보든 가 살인사건은 어째서 유명해졌을까.

보든가 살인사건은 도끼로 각각 약 40차례 후두부를 가격했다는 살해 방식의 잔인함 때문에 악명 높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명망 있고 재산도 상당한 가문의 가부장이 살해당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사건 용의자로 딸이 지목됐다는 것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요컨대 ‘여성의 남성 살해’가 인식의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한 요소일 수 있다.

여성이 남성을 살해하는 것은, 그 반대 경우에 비해 이례적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남성으로 상징되는 가부장 질서를 전복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결탁한 가부장체제는 질서의 위계를 만들고 각 개인을 그 안에 욱여넣으려는 듯 보인다. 가령 ‘리지’에서의 보든 가의 논리에 따르면, 리지는 재산을 나눠가질 ‘합리적’ 조건을 갖추지 못한 여성이므로 이성적 남성이 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본과 명예로 상징되는 가문이 생물학적 ‘남성’으로 여겨져 왔다고 할 때, 리지(딸)의 아버지 살해는 이 질서를 뒤집는 사건이 된다. 아들이 아니기에 가문의 적자는 될 수 없고, 가문의 논리에 의해 언제든 내쳐질 수 있는 딸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은 상징 질서에 대한

‘상징적 살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딸’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살해한다는 것은 기실 처음부터 반역적인 셈이다.

또 다른 실화를 모티프로 한 소설 ‘그레이스’ 에서도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상징적 딸인 하녀 그레이스가 ‘아버지-가문’으로 상징되는 제임스 맥더못을 살해한다. 인물이 상징하는 바가 ‘리지’와 유사한 이 작품의 첫 머리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들이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내가 유명한 살인범이기 때문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여성-살인범이기 때문은 아니었는가. 그들이 이례적인 사례로 주목받은 이유는, 설령 개인적 이유로 저지른 살인이더라도 여성의 남성 살해가 ‘상징-가부장 살해’에 버금가는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살인자 여성’의 서사의 충격과 전복성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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