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34
무그산, 소그드인 최후의 저항지

실크로드 너머의 꿈들
 

8세기 아랍군에 대항해 소그드인이 최후의 항전을 했던 무그산 정상.

길은 태초부터 있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뿐, 길은 항상 그곳에서 인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길을 찾아서 여는 것뿐이다. 인간은 길을 열고 소통하면서 문명을 만든다. 그리고 문명에 익숙해질 즈음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인간을 끝없는 길 찾기에 나서게 재촉한다.

인류의 대동맥인 실크로드는 수천 년 동안 많은 상인과 순례자, 군인과 모험가 등이 오갔다. 무엇이 이토록 죽음까지도 마다않고 실크로드를 오가게 했는가. 아마도 그것은 ‘신념’이었을 것이다. 각자의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실크로드 너머에 있을 신비의 땅에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강인한 믿음.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죽음도 이겨낼 수 있었으리라.

꿈 또한 각자 달랐다. 상인들은 비단과 서역의 특산물을 실어 나르며 이윤을 챙겼고, 기독교와 이슬람교, 불교 등을 믿는 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 전파가 꿈이었다. 권력자들은 국가를 만들어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순례자들은 당시의 역동적 생활을 몸소 체험하고 이를 기록으로 전하고 픈 꿈이 있었다.

소그리인들의 최후 항전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를 이용해 밀을 탈곡하는 농부들.

8세기 초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군은 동진(東進)을 거듭해 지금의 사마르칸트와 펜지켄트 지역을 차지한다. 그리고 인두세(人頭稅) 면제라는 보상을 빌미로 그들의 문명인 이슬람교를 보급한다. 대다수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소그드인들은 수차례에 걸쳐 대항하지만 결국은 실패한다.

펜지켄트 역시 통치자인 데바슈티치의 지휘 아래 기사 3000명이 일치단결해 싸웠지만 3만 명의 아랍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수비하기 좋은 무그(Mug)산으로 이동해 배수진을 친다. 해발 2600m의 무그산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를 요량이었다.

소그드인들은 산 정상에 견고한 요새를 쌓고 소, 말, 양 등의 가축과 식량, 각종 중요한 문서 등을 옮겼다. 그들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저항했지만 승부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데바슈비치 왕은 아랍 총독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우리를 살려주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 속에서 조용히 살겠노라고. 아랍 총독은 이를 거부했고 왕과 소그드인들은 무그산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무그산성으로 가는 길
 

소그드인의 문서가 발견된 무그산 성터.

아침부터 8세기 소그드의 마지막 저항지인 무그산성을 보기 위해 서둘렀다. 그러나 7월의 태양은 새벽부터 찾아와 고지대를 뜨겁게 달군다. 섭씨 46도. 에어컨 없는 차량이 잿빛 먼지를 날리며 달려도 그 사이로 느껴지는 바람에 감사할 뿐이다.

무그산은 펜지켄트에서 동쪽으로 60㎞ 떨어진 곳에 있다. 좌우로 늘어선 협곡 사이를 구비 구비 감도는 제랍샨강은 무그산으로 가는 길을 천연의 요새로 만들어놓았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산들이 그렇듯 깎아지른 민둥산이 하늘을 찌른다. 그 사이를 회색의 강이 아우성치며 흐른다. 아우성 소리에 길도 놀라 비틀리고 휘어졌다.

이러한 강을 건너 나지막한 평지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창 밀 수확 시기여서인지 길마다 마른 밀들을 깔아놓고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기계 없이 도리깨질로만 탈곡하기에는 식구들을 다 동원해도 부담이 됐던가? 자동차의 기능이 하나 더 있음을 이곳에서 배운다.

1시간을 달렸다. 무그산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자동차는 더 이상 갈 수 없다. 걸어서 산을 올라야한다. 산길을 잘 아는 동네 꼬마를 앞장세운다. 아이는 다 닳은 슬리퍼를 신고도 등산화를 신은 나보다 훨씬 경쾌하게 오른다. 숨이 턱에 차는 건 나만의 일인가. 어느 일본인 작가는 무그산을 오르며 몸속 온도까지 합쳐 80도의 지옥이라 했는데, 과연 실감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땀에 절고 숨참에 쉬어가며 8세기 소그드인이 최후를 맞이한 요새를 기어오른다.

710년 3월 25일의 혼인계약서
 

무그산성에서 내려다 본 제랍샨강.

1932년 어느 날, 양치기 소년이 버드나무 상자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이상한 문자가 새겨진 나무 조각 하나를 주웠다. 유명한 ‘무그문서’의 발견이다. 1933년과 1946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 결과 양피지 종이, 가죽, 나무 등에서 소그드어와 아랍어, 중국어 등으로 기록된 문서 76통이 발견돼 8세기 초 소그드문화 해명에 귀중한 열쇠를 제공했다.

많은 문서 중 관심을 끄는 것은 혼인계약서이다. 710년 3월 25일 금요일에 작성된 신랑 우토테긴과 신부 챠트의 혼인계약서는 서로 사랑과 존경을 서약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의 해결책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즉, 남편이 아내 동의 없이 다른 여인을 얻으면 암소 세 마리 값을, 이혼하려면 신부에게서 받는 물건과 돈을 돌려줘야 하고, 신부 역시 신랑에게서 받은 의복과 패물을 돌려줘야 한다.

이는 현대인도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다. 특히, 신랑은 투르크인이고, 신부는 소그드인이다. 이들은 어떻게 이민족 간 혼인을 할 수 있었을까. 이는 서로 상생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즉, 실크로드 무역을 주름잡던 당시 소그드 사회에서 투르크인이 정치·군사적 도움을 주고, 소그드인이 경제와 무역에 도움을 주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소그리인들의 수호신, 나나 여신
 

펜지켄트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루다키 박물관.

지옥의 날씨를 이겨내고 마침내 무그산 정상에 섰다. 제랍샨강에서 채취한 돌로 만든 성벽이 판축의 흔적과 함께 1000년의 풍파를 견디고 있다. 그 사이 아득한 절벽 아래를 흐르는 제랍샨강이 무그산 최후의 그날을 들려준다. 그렇다. 회색 강물의 빠른 물살에 휩쓸려 아우성치며 구르는 자갈처럼 역사도 다분히 자갈들의 아우성을 회색으로 가린다. 그리고 하류에 모래로 흩뿌린다. 하지만 모래알은 보다 견고해져 육지가 된다. 평야나 산이 되어 강물을 굽어볼 것이다.

펜지켄트 시내에 위치한 루다키 박물관은 펜지켄트 도성지와 무그산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해놓았다. 이곳에도 벽화의 일부분을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사자의 등에 앉은 팔이 넷 달린 여신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여신은 생명을 지켜주는 나나 여신이다. 이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소그드인들에게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다. 소그드인들은 수호신이 필요했고, 생명을 지켜주는 나나 여신이 험난한 여정에서 수호신의 역할을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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