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이 났다. 온 몸이 안 쑤시는 데가 없다. 밤새 끙끙 앓고 땀범벅이 되어 겨우 눈을 떴다. 남편이 어디 아픈 거냐며 필요한 게 있는지 묻는다. 나는 “없어”라고 무심히 답한다. 여섯 달 만에 나눈 대화는 싱겁고 짧게 끝나버렸다.

남편과 말없이 지내고 있다. 결혼한 지 만 5년이 되니 해소 못한 갈등이 쌓일 대로 쌓여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왔다. 다툼의 원인은 음주로 새벽녘에 귀가하는 날이 잦은 남편 때문에 내 일상이 피곤해진다는 것, 그리고 집안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남편의 태도였다. 내가 프리랜서로 전업하면서 아침잠을 푹 잘 수 있게 되자 술로 인한 갈등은 많이 줄었다.

그러나 집안일 문제는 도무지 좁혀질 기미가 없었다. 남편에게 나의 요구는 대부분 잔소리였고, 남편은 내가 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화를 낸다고 받아들이는 듯 했다. 남편과 생활비를 나눠 내고 은행 빚도 절반씩 갚고 있는 상황에서 거의 모든 집안일을 나 혼자 해온 지 5년째.

ⓒ심혜진.

나는 억울했다. 다툼이 잦아지다가 어느 순간 나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절묘하게도 내가 입을 닫고 나서야 남편은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변한 건지, 나는 아직 그 이유를 모른다.

오늘도 남편이 청소기를 돌리고 나갔다. 기운이 없어 한참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팠다. 김치콩나물국을 끓여 먹을 생각에 기어가다시피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큼지막한 반찬통이 눈에 들어왔다. 늘 보던 것이지만 오늘따라 화가 치밀었다. 양념게장에서 게만 골라 먹고 남은 양념찌꺼기다.

지난해 10월, 농사짓는 시댁에서 과일과 먹을거리 몇 가지를 보냈다. 예전 같으면 커다란 상자를 열어 속에 든 내용물을 펼쳐놓고 적당히 소분해 냉장고와 베란다에 나눠 보관하느라 반나절은 종종거렸을 거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 결혼 전에도 시골에서 먹을거리가 자주 올라왔다는데, 그땐 정리를 잘 하던 남편이 두 손을 놓게 된 데에는 ‘알아서 먼저’ 처리해온 내 책임도 컸다.

밤늦게 돌아온 남편은 씻기도 전에 택배 상자부터 정리했다. 다음 날 냉장고를 슬쩍 열어보니 말린 생선과 반찬 몇 가지가 들어 있었다. 그 중 한 가지가 양념게장이었다.

시어머니는 식구들이 모일 때면 언제나 양념게장을 무친다. 눈대중으로 대충 양념을 하는 것 같지만 맛을 보면 언제나 그 맛이다. 달작지근하고 매콤한 양념이 듬뿍 묻은 살이 많은 게장은 밥을 떠먹는 걸 잊을 정도로 맛이 좋다. 맘 같아선 게장과 밥 한 그릇 뚝딱 하고 싶었지만 시기가 시기니만큼 침만 꼴깍 삼키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게장은 며칠 동안 차츰차츰 줄어들다 어느 순간 양념만 남았다. 게장을 다 먹은 남편은 남은 양념의 존재를 잊은 듯했다. 그렇게 몇 달 째 냉장고엔 게장양념 그릇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거다.

골골대는 내게 필요한 거 있느냐고 묻던 남편의 질문에 그제야 답을 하고 싶었다. ‘저 게장 그릇을 꺼내 설거지할 순 없을까? 설거지가 끝난 뒤엔 싱크대 주변 물기를 행주로 닦을 순 없을까? 그리고 다 마른 그릇은 선반에 정리를 해둘 순 없을까? 청소기, 세탁기 돌리는 것만 집안 일이 아니잖아.’ 그 다음에야 남편에게 “물어봐줘서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TV 프로그램 ‘백종원의 골목식당’에서 식당 주인에게 백종원이 하는 이야기들-주방을 청결하게 관리하라든지, 먹거리를 만지기 전엔 반드시 손을 씻으라든지 하는-을 각 가정의 주방에 그대로 옮겨 놓는다는 상상을 해봤다. 아마 전문가의 이유 있는 조언은 누군가에겐 귀찮은 잔소리로 둔갑하게 될 거다. 내가 지나치게 ‘우리 집’ ‘내 남편’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글쎄다. 정말 그렇다면 이 글은 당장 폐기처분해도 좋다고 중얼거리며 냉장고 속 게장양념 그릇을 다시 한 번 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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