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2018년 개봉

12월 12일 한국 40여개 관에서 개봉하고, 14일 넷플릭스로 온라인 개봉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를 두고 소문이 무성했다. 개봉관이 워낙 적으니 극장에서 봤다는 사람은 드물었고, 넷플릭스로 본 이들의 입에서 나온 소문이었다. 하나 같이 극찬했다.

아직은 모니터로 영화 보는 게 성에 영 안 차는 옛날사람인지라 당장 극장에 달려가 보고 싶었다. 다행히 인천에서도 상영하는 극장이 있긴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개봉 2주차 끄트머리에 가서야 비로소 볼 수 있었다.

우와! 소문 많은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옛말이 무색하리만큼, 엄청난 영화였다.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우선 매우 세련된 현대 회화 같은, 그러나 반전이 있는 오프닝 타이틀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의 모든 씬은 나무랄 데 없는 작품사진이다. 한 씬 한 씬 공들여 찍은 흑백화면이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1971년 멕시코시티의 공기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소리는 또 어떤가.

요즘 영화라면 기대할 법한 특수효과는 없다. 오로지 화면과 소리, 영화가 줄 수 있는 본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해 보여주고 들려준다.

아름다운 화면과 소리보다도 더 마음을 사로잡은 건, 계급ㆍ인종ㆍ젠더를 가로지르는 클레오의 삶. ‘로마’ 이전에는 연기 한 번 해본 적 없다는 얄리차 아파리시오의 클레오는 ‘살아낸다는 것’에 대한 경외감마저 느끼게 한다.

클레오는 멕시코시티의 중산층 가정에서 네 아이를 돌보는 보모이자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쉴 새 없이 집안일을 하는 입주 가사노동자다. 말이 가사노동자이지 하녀다.

캐나다로 출장을 떠났다는 아이들 아버지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어머니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의 예민한 신경질까지 받아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클레오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한다. 그 와중에 동료 아델라와 자매처럼 수다를 떨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남자친구 페르민과 데이트도 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다.

어쩌면 별 다를 것 없는 클레오의 삶에 고난이 닥친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고,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남자친구가 잠적해버린다. 임신 중단은 생각하지도 못할 1970년대 멕시코에서 불러오는 배를 안고 소피아의 집에서 계속 일을 하던 클레오는 만삭의 몸으로 시내에 나갔다가 격렬한 시위대와 마주친다.

클레오의 삶이 통과하는 1970년대 멕시코시티의 모습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극심한 빈부격차, 정부의 개발정책으로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는 선주민들,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열망, 시위대를 진압하는 우익무장부대로 포섭되는 하층계급…. 당시 멕시코의 복잡한 정치ㆍ경제 상황이 촘촘히 직조돼있다.

이런 배경이라면 흔한 시대극의 서사를 따라갈 법도 하지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남성영웅이 아니라 시대의 격랑을 통과하는 선주민 소수민족 하층계급 여성 클레오의 삶을 중심으로 서사와 감정을 쌓으며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과거 시대를 재현하는 영화들이 빠지기 쉬운 전형성의 함정을 벗어나 훨씬 풍부한 결을 만든다.

영화의 제목인 ‘로마’는 우리가 익히 알던 그리스 로마가 아니라,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나고 자란 멕시코시티의 동네 이름이다.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멕시코의 선주민 소수민족 하층계급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제목이 서구 백인 제국의 상징이자 중심인 로마라는 것이 꽤 의미심장하다. 격동의 시대 클레오의 삶을 지탱해준 것은 동료 선주민 여성들, 그리고 소피아 가족이 보여준 ‘자매애’였다.

넷플리스 배급이니 집에서도 볼 수 있겠지만, 꼭 극장에서 보길 권한다. 이 아름다운 화면과 소리를 놓치지 않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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