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물건 언제 생겼지? 13. 김치냉장고
이 물건 언제 생겼지? 13. 김치냉장고
  • 심혜진 시민기자
  • 승인 2018.12.3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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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생 전쟁둥이인 이입분(68)씨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부터 프랑스 산 ‘에비앙’ 생수까지 모두 맛본 세대다. 그가 온몸으로 통과한 현대생활사를 물건을 통해 되짚어보려한다. 이입분 씨는 내 엄마다. (기자 말)

엄마는 혼자 살면서도 해마다 김장을 한다. 나는 엄마에게 김치 한 포기를 얻어먹는다. 나 이외에 엄마 김치를 가져가는 사람도 없고 엄마네 집이 늘 손님으로 들끓는 것도 아니다. 한겨울에도 채소가 지천이고 식비도 많이 들지 않을 텐데 굳이 힘들게 김장을 할 이유가 있을까?

“김장철에 나오는 배추가 제일 맛있거든. 봄배추는 물이 많아서 김치를 하면 물러. 김치를 왜 사먹지 않느냐고? 그러게. 파는 김치도 맛있긴 하더라. 근데 어렸을 때부터 늘 해먹어 버릇해서 사먹는 건 익숙하지가 않아. 김치는 계속 해먹고 싶어.”

엄마에게 옛날 김장하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어렸을 땐 집집마다 물이 나오지 않아서 배추를 씻고 절이는 게 일이었어. 지게나 리어카에다 배추를 싣고 마을 공동 우물에 가서 씻어오는 거야. 배추김치는 보통 300포기 넘게 했어. 농사지은 거라 지금처럼 배추가 크지도 않고 자잘하지. 총각김치도 큰 항아리로 가득 했고, 동치미도 잔뜩 담가. 김장독은 어른 둘 셋은 들어갈 만큼 크지. 집마다 마당에 그런 큰 항아리 예닐곱 개는 묻었어. 어떤 집은 열 개도 묻어. 겨우내 거의 김치 하고만 밥을 먹으니까. 봄에 채소 나올 때까지는 그래야 해.”

엄마의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근데 김장하기 전에 할 일이 무지 많아. 고추 말려서 고춧가루 빻아놔야지, 젓갈도 집에서 담가서 썼어. 봄에 멸치랑 박대 같은 거 사다가 소금에 절여 놔. 그걸 김장할 무렵에 가마솥에 넣어 달여서 창호지 두세 겹을 깔고 바구니에다 액젓을 내려. 말갛게 국물만 내려서 김장을 하는 거야. 달이지 않고 하는 집도 있는데 그러면 김치 색깔이 시커매. 김장만 하는 게 아니야. 무청은 소금에 절여서 항아리에 담아놓고, 배추 겉잎은 말려서 삶아. 나중에 꺼내서 삶아서 된장찌개도 해먹고 볶아 먹기도 하고. 배추 잎사귀 하나 그냥 안 버렸어.”

김장 풍경 이모저모

김치. (사진출처 픽사베이)
김치. (사진출처 픽사베이)

김장은 어느 집이든 먹고 살기 위해선 필수로 해야 하는 것이었다.

“남에게 구청하는 것 중에 김치나 장을 달라는 것이 창피한 것 중에 제일 창피한 것입니다. 구청을 하여 그 사람이 잘 보낸다 하더라도 퍼내어 보내는 것이 첫 번 나는 향취가 다 나가서 맛도 없을 뿐 아니라 더러 주는 사람은 큰 생각으로 한두 동이를 퍼내어 보내면 한 독에까지 허록하니 헤퍼서 그 독은 그럭저럭 없어지게 되며 받아먹는 사람도 갈급이 날 뿐이고 신세는 신세대로 지게 됩니다. 이런 고로 아무리 어려워도 김장은 해야 합니다.”(동아일보 1931.11.10.)

‘김장은 반 농사’라 할 만큼 일도 많고 해놓으면 든든했다. 먹을 것이 없는 겨울철, 김장은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과 영양을 채워주는 귀중한 음식이었다. 반대로 준비해놓지 않은 집에선 이보다 더 큰 걱정거리는 없었다. 남의 집 항아리에 손을 대는 일도 잦았다.

“엄동을 앞에 두고 남들이 다 하는 김장을 못하야 근심하던 나머지 남의 것을 절취하여 김장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가련한 소부의 김장기의 애화가 있으니 그는 해주읍 남욱정에 거주하는 목수 조태경의 처 신장녀로 남편이 목수일을 하여 받는 일급 몇 십 전으로 네 명의 가족이 생명을 근근이 이어나가기는 하나 엄동을 앞두고 세상에서는 김장 준비에 분망한 이때에 신장녀는 남편의 번 돈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을 생각하고 지난 16일 밤에 죄됨을 알면서도 남의 독 무, 파, 마늘 등 김장품 전부를 절취하여 김장을 하던 중 17일에 발각 체포되어 사실을 자백하였다 한다.”(동아일보 1934.11.20.)

김장철 생계형 절도는 1960~70년대 도시에서도 이어졌다.

“서울용산서는 15일 10대 절도단(돼지파) 윤모(17) 등 5명을 절도혐의로 구속했다. 12살부터 17살까지의 이들은 모두 지방에서 집을 뛰쳐나와 서울시내에서 구두닦이를 해 온 소년들로 김장철이 시작되자 매일 중앙청과시장에 나가 주부들이 장을 봐 차에 싣고 가는 김장거리를 훔쳤는데 (중략) 지난 20여 일 동안 50여 회에 걸쳐 배추, 무, 파 등 김장거리 2만여 원어치를 훔쳤다고 진술, 훔친 것은 무허가 음식점에 배달하거나 많이 훔친 날은 훔친 배추를 시장 안에서 모아 놓고 배추장사를 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날씨가 추워져 구두닦이가 어렵기 때문에 이런 짓을 했다고 말하고 그동안 번 돈은 방값과 밥값을 빼고는 모두 저축, 비오는 날과 추운 겨울철 준비를 해왔다고 진술했다.”(경향신문 1970.12.15.)

아파트 생활과 김장 보관

김치독. (사진출처 픽사베이)
김치독. (사진출처 픽사베이)

우여곡절 끝에 김장을 해도 날이 따뜻하면 시어버릴까 걱정, 날이 추우면 얼어버릴까 걱정이었다. 여러 모로 땅에 묻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만 마당이 없거나 셋방살이를 하는 경우에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했다. 해마다 김장철만 되면 김장보관법 관련 기사가 신문에 등장했다.

“김장독 보관은 섭씨 4도 전후에서 기온의 변화를 겪지 않는 것이 최적이므로 땅에 묻는 수밖에 없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가마니로 싸고 덮어서 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동아일보 1967.10.26.)

김장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파트 생활이었다. 1970년대 들어 서울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김장독 묻을 곳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스팀이 들어오지 않는 아파트에서는 항아리를 두 겹 정도 가마니로 싸두면 그런대로 김장을 맛볼 수 있으나 스팀이 들어오는 아파트에서는 김치가 쉽게 시어진다. 합성수지(스티로폴)로 만든 아파트 김칫독을 사서 비닐봉지에 김장을 담아 넣어 베란다에 두어도 별 이상은 없겠으나 항아리의 경우엔 얼어 터지게 된다. (중략) 아파트 베란다 한 쪽에다 항아리 전부를 가지런히 놓을 수 있는 베니어박스를 만들고 항아리를 넣은 후 그 주위를 톱밥이나 흙 또는 왕겨로 메워두면 혹한에나 난동에서도 별 지장 없이 김치맛을 유지할 수 있다. 또 항아리 주위에 석면을 두르고 왕겨를 넣으면 더욱 안전하다.”(매일경제 1972.11.20.)

아무리 애를 써도 아파트에서 김장을 제대로 보관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보완책을 고민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11월 하순 경에 지렛김치를 20일 분 정도 담그고 12월 초에서 중순 사이에 본김장을 담가 음력 정월 이전까지 먹도록 한다. 그리고 정월 이후에는 최근 흔해진 비닐하우스 야채인 제주도산 봄동이나 하루나 등으로 풋김치를 담그는 가정이 많다.”(매일경제 1978.11.26.)

또 다른 한편으로 항아리를 대신한 새로운 김칫독이 시장에 나왔다. 가족 수가 줄어 커다란 김장독이 필요가 없어진 데다 항아리는 무겁고 금이 가거나 깨지기 쉬워 다루기 불편한 점이 많았다. 1970년대부터 플라스틱 용기가 보급돼 빠르게 항아리를 대체했다. 1980년대엔 스테인리스 김칫독이 선을 보였다. “특수단열재를 사용, 보온과 냉동이 함께 되기 때문에 외부 온도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특징”(동아일보 1981.9.29.)이라고 이 상품을 소개하고 있으나, 김치가 시어버리는 걸 크게 막지는 못했다.

김장공장 성업과 김치냉장고

김치냉장고.(사진출처 국립국어원, 누리-세종학당)
김치냉장고.(사진출처 국립국어원, 누리-세종학당)

김치공장도 변화의 물꼬를 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생활이 바빠지고 모든 것이 상품화하다보니 최근엔 대규모 김치공장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70년대 초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공장은 이제 서울 근처에만 20여개 가까이 성업 중. (중략) 여 사장 박선희씨는 ‘늘어나는 아파트에 공급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김치 생산에 착수했는데 그보다는 병원, 기업체의 식당 등에 팔려나가고 있다’고. (중략) 아직 김장을 김치공장에 맡기려는 주부는 별로 없다는 뜻이 되겠지만 변해가는 세태 속에 김장 풍속이 어떻게 더 변할지 모를 일이다.”(동아일보 1980.11.4.)

공장의 주문식 김장은 곧바로 인기를 끌었다. 양념과 젓갈까지 선택해 원하는 양만큼 집으로 배달해주니 맞벌이 가정에선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었다.

“아파트 보급으로 주거양식이 달라지고 온실 재배를 통해 계절에 관계없이 신선한 채소류의 공급이 가능하게 되자 김장철이란 개념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가운데 상품김치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에 따라 상품김치가 등장한 지 불과 5년 전후 동안에 김치공장도 크게 늘어 전국적으로 5백여 군데에 이르고 있다.”(매일경제 1984.11.27.)

1990년대엔 대기업까지 김치사업에 뛰어들었다. 두산농장이 ‘종갓집김치’를 상표로 내걸었고, 미원과 삼호물산도 액젓과 김치 등의 생산ㆍ판매에 나섰다.

1993년, 삼성전자와 금성사(엘지의 전신)가 각각 다른 방식의 김치냉장고로 첫 선을 보였다.

“최근 삼성전자와 금성사는 김치 숙성 기능을 갖춘 김치냉장고 판촉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중략) 삼성전자는 154리터 용량으로 김치만을 보관하는 김치 전용 냉장고, (중략) 금성사는 단열구조를 채용한 김치 전용실과 원적외선 세라믹 재질로 특수 제작한 김장독을 설치(후략)” (매일경제 1993.1.21.)

금성의 ‘김장독 냉장고’는 세 달 만에 7만대 넘게 팔려나가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로 김치냉장고는 웬만한 가정의 필수 가전으로 자리 잡았다.

90년 전, 용기 있는 여성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4인 가족이 올해 김장 때 소비한 배추는 23.4포기라고 한다. 지난해에 비해 1포기 줄었다. 그래도 김치를 담가 먹는 가정은 63%로 여전히 절반을 넘었다. 이중 절임배추를 사는 비율은 53%로 해마다 늘고 있는 추세다.

양이 적어졌다고는 하지만 김장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늘 하던 버릇이 든 이들에겐 안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엄마의 지인 중 여든을 넘긴 이는 올해 김장을 세 포기했단다. 많이 하긴 힘들고 안 하려니 ‘죄스러운’ 생각이 들어 기분만 내려 했다는 거다. 이미 90여 년 전, 한 용기 있는 여성은 이런 글을 남겼다. 그의 이름은 실리지 않았다.

“여편네들이 길에서 만나면 첫 인사가 댁에 김장 다 했소 하는 것이다. 참으로 김장 해놓는 일이 큰일이다. (중략) 김장을 다 잘 해 놓는다 하더라도 그 집 주인마누라는 다리를 뻗고 자지를 못한다. (중략) 갑자기 더워지면 김치가 시어져서 다 버리게 될까봐 걱정, 갑자기 추워지면 김치가 잘 아니 익을 걱정, 김치 묻은 곳에 볕이 드니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너무 짜게 해 넣지 않았나, 너무 싱겁게 해 넣지 않았나, 이 걱정 저 걱정 (중략) 이와 같이 김장하는 일이 큰일이오, 어려운 일이며 주부의 간장을 태는 일이다. (중략) 부인네들 하는 일 가운데 이 김치 담그는 일 하나만 덜어 두어도 부인들은 얼마나 시간의 여유가 있으며 안식할 틈이 있게 될는지 모른다. (중략) 그러므로 김장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절대로 필요하다. (후략)”(동아일보 1926.11.12.)

김치회사가 생겨도 절반은 여전히 김장을 한다. 겨울마다 그 힘든 일을 자처하는 것을 습관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벼운 해석이고, 전통과 문화라 하기엔 고됨을 가려버리는 측면이 있다. 무엇이 좋은 길일까. 여전히 어렵다. 노동과 정성을 무시하기도 쉽지 않다. 내가 엄마네 김장을 딱 한 포기만 먹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