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고, 모델 내면의 우아함을 표현한다”

녹색 부가티를 탄 타마라
 

녹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1929|개인소장.

이탈리아 최고급 스포츠카인 녹색 부가티를 타고 도도한 표정으로 관람자를 바라본다. 몽환적인 눈빛에 빨간 립스틱. 에르메스 스타일의 세련된 모자와 우아한 실크스카프는 녹색의 차와 대비돼 한층 고급미를 발산하고, 팔까지 내려오는 황금빛 장갑은 도회적 이미지를 더해준다. 파티에 참석하는 여배우처럼 머리끝에서 손끝까지 완벽한 치장이다. 노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도발적이고 강렬한 이 그림은 아르데코의 여왕 타마라 드 렘피카의 ‘자화상(녹색 부가티를 탄 타마라)’이다. 아르데코는 장식미술을 뜻한다.

이 그림은 독일 여성잡지 ‘디 다메(Die Dame)’의 표지 그림을 주문받아 그렸다. 부와 명예와 사랑에 대한 욕망에 솔직한 타마라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모습을 ‘운전대를 잡은 여인’으로 묘사했다. 남편이나 다른 남자의 도움 없이도 자신이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 주체적 여성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달라진 여성의 모습과 여성해방의 상징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은 여성들을 밖으로 이끌었다. 전쟁 전후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여자들은 군수산업ㆍ의료산업ㆍ석탄산업 등에 종사하게 됐고, 그 이후 다양한 산업에 뛰어든다. 점차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노동을 넘어서 기계 조작과 같은 남성 전유물이던 직업에 여자들이 진입하면서 여자에게도 사회적 능력과 지위가 생겼다. 타마라의 자화상은 신여성의 스타일을 과시하는 것 이상의 향상된 여성 능력과 지위를 말한다.

여성과 자동차라는 조합은 그 자체만으로 여성 자치권의 암시와 사회적ㆍ기술적 영역의 여성 지배권을 보여준다. 타마라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자의 이미지를 부가티를 탄 모습으로 상징화했다.

원래 타마라가 타고 다녔던 자동차는 노란색과 검은색의 작은 르노였다. “그것을 운전할 때마다 나는 똑같이 노란색의 풀오버를 입었고, 항상 검은 스커트에 모자를 썼다. 나는 차처럼 입었고 차는 나 같았다.” 그녀는 차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영어 이름도 언어유희를 섞은 ‘Auto-portrait(자동차 초상화)’이다.

그의 그림은 독특하고 독창적이라 다른 작가의 그림들과 섞어 놓아도 단박에 찾아낼 수 있다. “수백 개의 그림들 중에 내 그림은 금방 알아볼 것이다. 나는 남의 것을 베끼지 않고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다. 색을 가볍고도 밝게 쓰며 모델 내면의 우아함을 표현한다.”

르네상스 고전주의 미술에 큐비즘 양식을 섞다

타마라 드 렘피카는(1898.5.16.~1980.3.18.)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마리아 고르스카. 프랑스 무역회사의 변호사 아버지와 귀족 출신 어머니 밑에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나 부유한 유년기를 보낸다. 그 덕에 어린 시절부터 유럽여행을 다녔고, 스위스 로젠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1년에는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을 끔찍이 사랑한 할머니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들을 접했다. 다음해 부모의 이혼으로 이모가 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타마라는 18세 때 잘생기고 성공한 변호사 테데우즈 렘피키와 결혼한다. 다음 해 딸 키제트가 태어났고, 이 때 남편이 볼셰비키혁명에 연루돼 총살 위기에 처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와 가족들은 파리로 망명한다. 낯선 곳에 정착하는 것은 예상보다 어려웠다. 남편은 이방인의 위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타마라의 친척이 주선해준 은행일도 마다한 채 2년 넘게 실직 상태였다. 타마라는 가지고 있던 귀금속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어린 딸을 키워야하는 타마라는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살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름을 ‘타마라 렘피카’로 바꾼다.

그랑 쇼미에르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해 이탈리아 거장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기본을 다졌다. 이어서 랑송 아카데미에서 상징주의 화가 모리스 드니에게 사사하며 고갱을 위시로 해 한창 유행하던 상징주의와 색면주의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그녀의 두 번째 스승인 앙드레 로테는 타마라가 자신만의 화풍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피카소의 큐비즘이 호평을 받던 때다. 타마라는 평소 자기가 좋아한 르네상스 고전주의 미술에 큐비즘 양식을 섞어 초상화를 그렸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살롱 도톤과 살롱 데 앙데팡당 등에서 전시회를 열게 됐고, 1925년 밀라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가브리엘 단눈치오(1863~1938)를 만난다. 그는 레닌이 유일한 이탈리아 혁명가로 칭하고 무솔리니가 보호하는 영향력 있는 인사였다. 단눈치오는 초상화 의뢰를 명목으로 그녀를 그의 유명한 빌라에 초대했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그의 가정부가 그 사실을 폭로했다.

전형적인 여성성을 모두 벗어버리다
 

발코니에 있는 키제트|1927|퐁피두 미술관.

1927년 보르도 국제미술전에서 딸 키제트를 그린 그림 ‘발코니에 있는 키제트’로 1등을 차지한다.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교계의 주목을 받으며 스타 화가가 된 그녀는 권위 있는 미술전에서 상까지 받으며 엄청난 속도의 성공가도를 달린다.

‘발코니에 있는 키제트’는 11세 키제트를 모델로 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오묘한 분위기다. 중성적 느낌이 나는 반항적 눈빛을 가진 키제트. 반 양말을 신은 통통한 다리와 구두, 기울어진 오른쪽 발 모양이 그의 나이를 대변한다.

“그녀의 예술은 반항적인(defiant) 몸짓 그 자체다.” 이 그림에 대한 피츠버그 <선-텔레그래프 신문>이 내놓은 평이다. 앉아있는 소녀의 그림이 뭐가 그렇게 반항적일까. 이 그림은 1920년대에 그렸다. 여태까지 그려진 소녀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리본을 허리에 매고, 긴 곱슬머리에 화려한 모자,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마치 잘 관리된 인형 같다. 하지만 그림 속 키제트는 짧은 머리에 헐렁한 짧은 원피스, 차가운 눈빛을 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려는 천진난만한 미소도 없다. 지금까지 소녀라고 그려진 전형적 여성성을 모두 벗어버렸다. 거기에 배경으로 그린 고층 빌딩이 가득한 도시의 풍경은 이미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20세기 초까지도 회화에서 여성의 모습은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약하고 관능적이거나 청순함ㆍ온순함이 여성성을 대표했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 여성의 모습에서 점점 탈피한 새로운 여성상이 제시됐고, 타마라는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빼어난 미모의 타마라는 사랑에도 거침이 없었다. 양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 그녀는 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고, 아름다운 여인들과도 사랑을 나눴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라파엘라’라는 여인에게 반해 모델이 돼줄 것을 요청한 뒤 그녀를 모델로 다수의 누드화를 그렸는데 특히 ‘아름다운 라파엘라’가 독보적이다. 카라바조 풍의 빛의 대비가 선명한 관능적인 이 그림은 남자의 시선에 대상화된 여인의 누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타마라의 시선으로 읽히며 차별성을 갖는다. 기본 표현은 최소화하고 색감의 강한 대비와 극적인 빛의 사용으로 모든 에너지가 라파엘라의 몸에 집중돼있다.

한 시절 강한 불꽃을 피운 아르데코의 여왕
 

아름다운 라파엘라|1927|개인소장.

1928년, 타마라는 남편과 이혼한다. 1933년 자신의 후원자였던 라울 쿠프너 남작과 재혼하고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미 뉴욕의 화랑들에서 전시했고, 예술과 패션 잡지에 소개되면서 타마라는 미국 정착에 금세 성공한다. ‘붓을 든 남작 부인’이라고 불리며 배우 못지않은 미모로 ‘어느 아름다운 근대식 아틀리에’라는 단편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세월은 흘러 추상미술의 시대가 오면서 그녀의 그림은 시대성을 잃었다. 추상화로 전향을 시도했지만, 예전만큼 힘을 받지 못한다. 1972년 룩셈부르크 화랑에서 타마라의 회고전이 대성공을 거두며 그녀는 재평가된다. 유명 배우 잭 니콜슨, 팝 가수 마돈나, 패션 디자이너 도나 캐런 등 이 그녀의 그림에 열광하며 수집한다. 그리고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칼 라거펠드와 루이비통의 마크 제이콥스 등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줬다. 화려한 기질과 시대적 흐름인 아르데코가 만나 한 시절 강한 불꽃을 피웠던, 아르데코의 여왕 타마라 드 렘피카는 1980년 92세의 나이에 멕시코에서 눈을 감는다.

자동차 잡지인 <오토저널>은 타마라 자화상을 보며 이렇게 썼다. “이 여인은 자유롭다!(This woman is free!)”

[참고서적] 타마라 드 렘피카 전시 도록, 한가라 미술관.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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