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인생 후르츠(Life Is Fruity, 人生フル?ツ)

후시하라 켄시 감독│2018년 개봉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 차근차근, 천천히.”
지난 가을 세상을 떠난 키키 키린의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건축가 쓰바타 슈이치와 아내 히데코. 슈이치는 아이치현 가스가이시 고조지 뉴타운 개발 사업에 참여했다. 숲과 도시가 어우러지는 마을을 만들고 싶었지만 경제논리에 밀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천편일률적인 아파트들이 바람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지어지고야 마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손을 뗐다.

대신 그와 아내 히데코는 고조지 뉴타운 300평 대지에 15평짜리 작은 집을 짓고 자신들만의 숲을 가꾼다. 이렇게 작은 숲을 가꾸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 언젠가는 커다란 숲이 되겠지, 하는 바람으로. 40년 동안 슈이치와 히데코의 노동이 묻은 그의 집은 50종의 과일나무가 계절을 알려주고 70종의 채소가 풍요롭게 밥상을 채우는 부부의 작은 우주가 됐다.

후시하라 켄시 감독의 다큐멘터리 ‘인생 후르츠’는 90세 슈이치와 87세 히데코의 일상을 담았다. 부부 외에 특별한 등장인물도 나오지 않고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지만 영화는 내내 분주하다.

남편 슈이치는 건축가답게 작업실에 앉아 이것저것 구상하며 설계도를 그리고 텃밭에 꽂아놓을 푯말을 만들고 색칠한다. 떨어진 낙엽을 모아 퇴비도 만든다. 친구들에게 매일 평균 10통의 편지를 써서 보낸다. 히데코는 요리, 뜨개질, 배틀 짜기까지 모든 것을 손수 만들고 보살핀다. 다달이 손녀에게 음식을 보내고 텃밭에서 난 과일과 채소를 이웃과 나눈다.

슈이치와 히데코의 반복적인 일상은 그들이 삶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규칙적으로 일하고 먹고 잔다. 편지를 쓰고 음식을 나누며 사람들과 사귄다. 작은 풀 하나 지나가다 잠시 쉬는 새 한 마리에게도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정원에서 자라는 120종의 채소와 과일에는 슈이치가 손수 만든 노란 푯말이 꽂혀 있다. 이름 아래에는 ‘죽순아 안녕!’ ‘작약- 미인이려나’ ‘프리뮬러-봄이 왔네요’ ‘능소화-붉은 꽃의 터널을 지나 보세요’ ‘여름 밀감-마멀레이드가 될 거야’ 등 다정한 인사말도 함께 적혀 있다. 문패에는 부부의 이름과 함께 ‘배달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문구가, 정원의 수반에는 ‘작은 새들의 옹달샘-와서 마셔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자연과 사람, 모든 것을 환영하고 감사하는 작은 정성에 웃음이 새어나온다.

노부부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키키 키린의 내레이션 마지막 문장을 따라서 읊조리는 나를 발견한다. 코츠코츠 윳쿠리. 꾸준하게 천천히.(영화에서는 ‘차근차근’이라 해석했지만, 의미로만 따지자면 꾸준함이 더 가깝다.)

슈이치는 자신의 건축철학이 시장에서 통하지 않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집에서 꾸준하게 쓰고 그리며 자신의 철학을 구현했다. 가부장적 가족 밑에서 순종적 여성으로 길러진 히데코는 결혼 이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는 법을 깨우쳤고, 거칠고 더디지만 작은 차받침부터 커다란 식탁보까지, 카레부터 푸딩까지 손수 만들며 삶을 가꿨다.

슈이치와 히데코의 꾸준함은 느리다. 커다란 변화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 당장의 변화는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삶은 답답한 아파트단지 한가운데 도토리나무 숲을 만들었고, 한 정신과 병동을 새롭게 바꾸었다. 무엇보다도 슈이치와 히데코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슈이치와 히데코 부부처럼, 지금부터라도 나의 리틀 포레스트를 짓기 시작해야겠다. 코츠코츠 윳쿠리. 꾸준하게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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