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사랑스런 조카가 둘 있다. 세 살 터울의 초등학생이다. 둘 다 외동인 걸 빼면 성별, 기질, 뭐 하나 비슷한 게 없다. 큰 조카는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해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혼자 있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작은 조카는 맞벌이 하는 동생 부부가 동시에 야근이나 회식을 할 때면 혼자 드라마 보는 걸 즐긴다.

두 아이가 신기할 정도로 다른 게 또 있다. 바로 식성이다. 큰 조카는 채소 먹기를 질색하는 반면, 작은 조카는 김치와 장아찌, 생 양파 등 다양한 채소를 맛있게 먹는다. 사실 큰 조카도 두세 살까진 밥과 김치, 채소 등을 주는 대로 척척 잘 받아먹었다. 심한 편식이 이대로 굳어져 채소 안 먹는 어른이 될까 걱정스럽다. 아기 때의 그 탐스런 식성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지난해 나온 한 연구 내용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런던대학 심리학자 루시 쿠기는 15년 동안 아동의 식습관을 연구했다. 그 결과 아이들이 채소를 싫어하는 건 진화 과정에서 나온 자연스런 습성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인류는 식량이 풍부하지 않은 척박한 환경에서 진화해왔다.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먹거리는 식물. 하지만 식물엔 독이 있다. 초기 인류는 수많은 식물 가운데 어떤 풀에 독이 있는지, 무엇을 먹어야 해독이 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잎과 뿌리, 줄기, 열매를 모두 직접 먹어보는 수밖에. 저 풀을 먹으면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지만,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생존을 위해 위험한 주사위를 던져야했던 이 상황을 ‘잡식동물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히 생존한 이들의 몸속엔 몇몇 독성을 처리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는다.

아이는 한 살까지 먹을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어른이 주는 대로 먹어야하고, 대부분 잘 받아먹는다. 24개월 무렵 아이는 스스로 걸어 다니며 주변을 탐색해 먹을 것을 찾는다. 그러나 아이에겐 아직 독을 처리할 능력이 없고, 안전함이 입증된 식물을 식별할 수 있는 경험도 부족하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에 빠지는 순간이다. 이 무렵 아이들에겐 식물을 먹지 않는 것이 생존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진화는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진행한다. 이전까지 멀쩡하게 잘 먹던 채소를 만 2세가 넘어가면서 하나 둘 안 먹게 돼 양육자의 속을 뒤집어 놓는 일은 고대의 유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절대 아이가 까다로워서가 아니다.

채소를 잘 먹는 작은 조카는 진화의 영향을 거스른 걸까? 그렇지 않다. 2004년 한 연구팀이 새에게 먹이를 주는 실험을 했다. 처음엔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갈색 먹이를 주다가 점점 빨간색으로 물들인 먹이로 바꿔갔다. 처음엔 빨간색 먹이를 먹지 않았지만 모든 먹이를 빨갛게 만든 후에는 새의 3분의 2가 먹었다. 하지만 나머지 3분의 1은 끝까지 먹지 않았다. 연구팀은 이를 통해 먹을 것을 선택하는 데 조금 더 도전적인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덜 도전적인 유전자를 가졌다고 해도 미리 포기할 일은 아니다. 새로운 음식을 꺼리는 건 어린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식성이 좋은 어른 원숭이와 함께 자란 원숭이는 마찬가지로 낯선 음식을 더 잘 수용한다는 연구가 있다. 결국, 건강하고 수용적인 식성을 가진 어른과 함께 자란 아이라면 한때 편식을 하더라도 결국엔 어른이 먹는 음식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큰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먹을 수 있는 채소가 무엇인지 물었다. 구운 마늘과 팽이버섯, 시금치, 콩나물, 김치찌개라는 답이 돌아왔다. 상추는 먹어보려고 시도해봤지만 쓴 맛 때문에 아직 먹기가 어렵단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에 여전히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조카. 그래도 시도했다는 말이 무척 반가웠다. 앞으로 조카의 ‘식용 가능한’ 채소 리스트가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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