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째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다. 논픽션 글쓰기가 직업인 내게 사람을 만나 인터뷰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인터뷰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른 사람이 하기 어려운 것을 이뤘거나, 큰 결정권이 있거나, 다른 이에게 귀감이 되는 일을 했거나, 어떤 사건과 관련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최근 내가 만난 사람들은 이런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시장 칼국수집 사장, 식자재 마트를 운영하는 상인 등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다. 엊그제는 장장 여덟 시간에 걸쳐 탈북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동안 세상에 자기 목소리를 내본 일이 없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이 하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으며 살아온, 평범한 우리 이웃이다.

내가 하고 있는 건 ‘구술생애사’ 작업이다. 상대가 자신의 생애를 말하고 나는 기록한다. 그동안 누구도 들으려하지 않은 약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사회 구조나 정치ㆍ경제적 변화가 한 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작업이다. 이전부터 구술생애사에 관심이 많아 몇 차례 관련 강의를 들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 올해 두 단체와 연락이 닿았다. 누구에게나 데뷔 무대는 필요한 법. 나는 두 단체의 요청을 덥석 받아들였다.

막상 계약서를 쓰고 나니 걱정됐다. 난생 처음(인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생애를 털어놓아준 분들에게 누를 끼칠까 두려웠다. 경험이 없다고 해서 서투른 건 용서가 안 된다. 비장한 마음으로 구술생애를 기록한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책들은 대부분 술술 읽혔다. 당연하다. 구술의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글로 표현해본 적이 없는 이들. 이들의 구술에는 어려운 용어나 비비 꼬아놓은 문장 따윈 없었다. 평범한 일상 말투 그대로였다. 무수한 날, 많고 많은 사건 중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건 분명 그 사람의 삶에 중요하게 자리 잡은 이야기일 터. 책장마다 담긴 생생한 목소리에는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때론 참혹함에 숨을 고르며 읽어야할 때도 있었다. 모든 목소리의 울림은 크고 강렬했다.

‘할배의 탄생’의 최현숙 작가는 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큰 고난을 겪은 사람에게는 그것을 뚫고 지나온 힘이 있는 거다” 구술생애사의 길을 찾으려던 내게 그 힘을 나눠준, 위대한 삶이 담긴 책 두 권을 소개한다.

# 할배의 탄생
| 최현숙 지음 | 이매진 펴냄

 

내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한 분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다른 한 분은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란 단어를 들으면 몇몇 표현이 떠오른다. 느린,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인, 말이 안 통하는, 무능한, 융통성 없는, 고집 센…. 죄다 부정적인 이미지다. 직접 겪어보지도 못한 남성 노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건 매스컴의 영향이 크다. 드라마나 영화 속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신문 사회면에 실리는 남성 노인들은 그리 존경할 만한 인물이 못됐다. 이런 이미지의 집결체는 현 시대 남성 노인을 대표하는 말인 ‘태극기 부대’일 것이다.
‘할배의 탄생’은 바로 이 태극기 부대에 섞여 있을 법한 두 남성 노인의 구술을 담은 책이다.

독거노인 생활관리사인 작가 최현숙은 1945년 생 김용술과 1946년 생 이영식(가명)에게 구술을 제안한다. 정 반대의 성격인 두 사람은 모두 흔쾌히 응했다.

“김용술은 일제강점기에 집안이 몰락해 가난하게 산다. 아버지는 ‘일본 종놈’을 만들지 않겠다고 학교를 안 보내지만, 김용술은 그 탓에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한다. 결혼하고 양복을 만들다가 기성복 시장이 커지자 양복점을 접고 섹스 비디오방을 차린다. 그 장사마저 아내에게 맡기고 서울에 와 채소 장사를 하지만 가진 돈 다 도둑맞고 떨이로 파는 ‘돼지호박 5500원어치’로 재기한다. 가정에 소홀해진 사이 아내는 바람을 피우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외면한다. 속궁합 잘 맞는 강 여사를 만난 뒤 이혼하고 구두 수선을 하며 잘 지내지만, 오늘도 가족들하고 화해하고 자기보다 어려운 노인들을 돕는 노년을 꿈꾼다”

“이영식(70세, 가명)은 1946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난다. 여섯 살 무렵 실수로 양잿물을 마신 친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 큰집에 가서 더부살이한다. 중학교를 그만두고 친구들하고 어울려 서울에 와 다방 주방에서 일한다. 남자다워지려고 안 가도 되는 군대에 가지만 작은 키 때문에 무시받자 ‘월남전’에 자원한다. 죽음의 공포를 겪은 뒤 돌아와 오랫동안 방황하며 노숙 생활까지 한다. 목수 일로 자기 생계를 꾸리지만, 가정은 꾸리기가 두려워 평생 홀로 산다”

두 노인의 삶을 압축해 표현한 출판사 리뷰를 옮겨왔다. 책 속에서 이용술과 이영식은 각각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위선을 부린 적도 없고, 내 손발로 땀 흘려서 살았어. 술이랑 성욕 때문에 많이 헤맸지만, 아닌 척 위선 떨지도 않았고 그걸로 남 등쳐먹지도 않았어. 내 잘못으로 꼬꾸라져도 그 자리에서 또 내 힘으로 일어섰고, 전에도 말했지만, 잡초 같은 생명력, 그게 나야. 잘난 것도 없지만 창피할 것도 없어”(130쪽)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요? 어머니가 오래 사셨더라면, 공부를 더 했더라면, 새 어머니 밑이라도 한집에서 자랐더라면, 월남에를 안 갔더라면, 떠돌이 목수 말고 다른 밥벌이를 하며 가정을 꾸렸더라면, 그래서 돈을 모으고 자식을 키웠더라면…. 부질없는 짓이지만 지난 일을 자꾸 떠올려요”(253쪽)

이들의 목소리를 읽어나가는 동안 두 인물의 생애가 소설 주인공의 삶처럼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세상에 그들이 내던져졌고, 거친 삶을 어쨌든 헤쳐 살아왔고, 지금의 삶에도 깊은 자국을 남겼다고 생각하니, 이들의 살아낸 힘에 존경심이 생겼다.
저자는 말한다.

“나는 고상함과 천박함의 구별 짓기를 지배자들이 계급과 정상성으로 약자를 차별하고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규범으로 본다. 김용술 같은 여유 없는 사람들은 천박할 수밖에 없고, 나는 그 점을 말과 글로 옹호한다. 상대가 천박해서 불편하다면 내 소갈머리를 살펴야한다. 천박을 옹호하려는 내 말과 글이 고상한 단어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내 삶과 언어의 치명적 한계다.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덜 천박하다면 내 삶의 여유에서 비롯된 ‘배운 년’의 체면과 껍데기 때문이다”(139쪽)

저자는 구술생애사 작가로 저서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와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를 펴냈다. 최근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가 새로 나왔다.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펴냄

 

구술생애사 강의에서 강사들이 빼놓지 않고 추천하는 책이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이다. 알렉시예비치는 옛 소비에트연방에서 독립한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로, 있는 그대로의 삶을 묘사하는 ‘목소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창시했다. 다큐멘터리 산문, 영혼이 느껴지는 산문으로 평가된다. 책 ‘아연 소년들’과 ‘체르노빌의 목소리’ 등을 펴냈고,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을 침략한 독일군은 벨라루스 지역을 점령하고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를 세웠다. 벨라루스인들은 게릴라식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인구 4분의 1이 희생됐다.

100만명이 넘는 여성이 이 전쟁에 참전했지만 그들 중 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진 경우는 없었다. 흔적 없이 사라진 이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저자 알렉시예비치는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 책은 그가 만난 여성 200여명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널빤지를 표적 삼아 연습만 하다가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을 쏴야 하니, 왜 안 그렇겠어. 나는 조준렌즈를 통해 그 장교를 보고 있었어. 아주 잘 보이더군.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그러자 마음속에서 뭔가가 저항을 하는데…‘쏘아선 안 된다’고 뭔가가 나를 말렸어. 다시 망설였지.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방아쇠를 당겼어…장교는 두 팔을 내저으며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어.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나는 몰라. (중략) 하지만 나는 곧 그 일에 익숙해져야만 했지. 그래…한마디로 끔찍했어! 결코 못 잊을 거야…”(73쪽)

그동안 본 그 어떤 영화보다 잔인하고 강렬하고 슬픈 이야기가 책장마다 흘러넘친다.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며 얼굴을 돌리는 옛 전사를 설득해 전쟁의 참상을 기어코 기록해내는 작가의 열정과 노력에 고개가 숙여진다. 혹여 아무 것도 아닌 개인의 이야기를 기록해 무얼 하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알렉시예비치의 이 말이 답이 될 것이다.

“정말 전선이니 전선의 활약이니 진격과 퇴각이니 그런 이야기, 전복된 열차가 몇 대고, 빨치산의 기습공격은 어땠는지 따위의 이야기가 필요한 걸까? 이미 수천 권도 넘는 책들에 등장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중략) 나를 흥분시키고 놀라게 하는 건 다른 것, 즉 ‘대체 거기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거기서 사람은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을 깨달은 걸까? 도대체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일까? 그리고 결국 나 자신은 누구인가? 나는 감정의 역사를 쓴다…영혼의 역사를 쓴다… 전쟁이나 한 나라의 역사, 영웅들의 인생역정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삶을 살다가 거대한 사건의 깊은 서사 속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작은 사람의 역사를 쓴다”(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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