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그림의 말들 - 까미유 끌로델과 로댕

중년|까미유 끌로델|1893-99|오르세미술관.

나이 든 여인이 한 남자의 어깨를 감싸고 어디론가 이끌고 있다. 이 중년의 남자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을 떼고 있다. 하지만 미련 한 자락이 남았는지 뒤에 있는 여인에게 뻗은 손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젊은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가지 말라고 애원하듯 두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하고 있다.

까미유 끌로델(1864-1943)이 만든 ‘중년’이란 작품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음, 사랑, 열정 같은 것이 사라지는 것이 운명이라고 표현했는데, 거기엔 보다 절절한 사연이 들어있다.

10년 넘게 사랑한 로댕(1840-1917)이 사실혼관계에 있던 여인에게 돌아간 뒤 홀로 버려진 그녀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이렇게 매달릴 순 없었지만 작품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으리라. 로댕은 자신의 사생활이 담긴 이 작품이 공개되는 게 두려워 까미유에게 작품을 의뢰한 정부에 주문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그는 이미 거장이 돼 그만한 힘을 가졌고, 그의 바람대로 주문은 취소됐다.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와 조각가 부셰

까미유는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등기소 소장인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사이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까미유가 태어나기 전, 첫 아들이 생후 2주 만에 죽자 슬픔에 빠진 어머니는 다음 아이가 아들이길 바랐다. 하지만 딸이 태어나자 실망했고, 그 실망은 딸에 대한 미움으로 번졌다. 죽은 아들을 기리는 의미로 이름마저도 까미유라는 중성적 이름으로 지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주머니에 작은 칼을 지니고 뭔가를 깎고 만들기를 좋아한 그녀는 숲속에서 우연히 괴물 형상의 ‘재앵’이란 바위를 발견한다. 신기하게 생긴 이 바위를 진흙으로 만들면서 조소에 관한 본능이 깨어난다. 이어서 나폴레옹 흉상, 비스마르크, 다비드와 골리앗에 관한 작품을 만든다. 어머니는 온몸에 흙을 묻힌 채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딸이 못마땅했지만, 아버지는 그녀의 재능을 읽어낸다.

1879년, 아버지는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에게 그녀의 작품들을 보여준다. 부셰는 그녀의 천재성을 단박에 알아본다. 조각의 기초를 알려주는 한편, 사립학교인 콜로라시 아카데미에 입학해 조각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 이곳은 모딜리아니의 부인 잔 에뷔테른, 인상파 화가 베시 멕니콜도 다닌 곳이다. 부셰는 그녀의 작품들을 교장에게 보여줬는데, 교장은 로댕과의 유사성을 언급하며 그에게 사사한 적이 있는지 묻는다.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그녀는 이를 계기로 로댕이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을 갖는다.

까미유와 로댕, 그리고 로즈 뵈레
 

사쿤탈라|까미유 끌로델|1905|로댕박물관.

까미유는 친구들과 노트르담 데 샹 거리에 작업실을 구해 작품을 만들었고, 부셰는 간간히 이곳에 들러 그녀를 지도한다. 1882년, 그녀는 하녀인 엘렌을 모델로 조각을 만들어 ‘살롱전’에 첫 출품한다. 이듬해 공모전에 당선돼 로마로 떠나는 부셰는 그의 제자들을 친구인 로댕에게 맡긴다. 이렇게 19세 까미유와 43세 로댕의 만남은 시작된다.

로댕은 까미유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하지만 그에겐 이미 20년 전 그가 무명일 때부터 그를 지원해주고 돌봐준 연상의 여인 로즈 뵈레가 있었다.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둘은 사실혼관계에 있었고, 둘 사이에는 까미유보다 두 살 어린 아들이 있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사람 마음. 결국 로댕은 까미유에게 고백한다.

“그대는 나에게 활활 타오르는 기쁨을 준다오. 내 인생이 구렁텅이로 빠질지라도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겠소. 슬픈 종말조차 내게는 후회스럽지 않아요. 당신의 그 손을 나의 얼굴에 놓아주오. 내 삶이 행복할 수 있게, 내 가슴이 신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몽롱하게 취한 상태에 있다오”(로댕의 편지)

하늘과 같은 최정상급 조각가가 이런 편지를 보냈으니, 가슴 떨리지 않을 수가. 문제는 술은 깨기 마련이고, 사랑은 식기 마련이라는 것. 다른 사람들은 훤히 보이는 빤한 결말이 사랑에 빠진 남녀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굳이 보려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를 통해 다시금 예술혼을 불태웠고, 그녀는 그의 모델이 되고, 조수가 되고, 연인이 됐다.

뜨거운 사랑, ‘사쿤탈라’와 ‘영원한 우상’
 

영원한 우상|로댕|1889|로댕박물관.

여인은 지친 듯 힘없이 남자에게 기대고 있고, 남자는 이제 아무 걱정 말라는 듯 여인을 껴안고 있다. 까미유의 심리적 의존 상태와 로댕의 뜨거운 사랑을 암시한 작품 ‘사쿤탈라(고대 인도의 칼리다사의 희곡)’다. 까미유가 만든 이 작품은 1888년 살롱전에 출품돼 대상을 차지한다.
로댕도 서로 상대방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작품을 만든다. 바로 ‘영원한 우상’. 남자는 여인의 가슴 아래 두 팔을 뒤로한 채 여인을 숭배하듯 기대어있다. 여인도 팔을 뒤로 한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두 작품의 분위기가 서로 닮았다. 까미유가 만든 석고 작품이 로댕의 작품보다 1년 앞선 것이다 보니, 로댕이 까미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둘의 작품들은 분위기가 비슷했는데, 그 이유로 표절시비에 자주 휩싸였다.

둘은 10년 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아이디어를 숱하게 공유했으며, 작품에 대한 상대방의 의견을 서로 존중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일일 터.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들’ ‘입맞춤’ 등 로댕의 걸작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고, ‘사쿤탈라’ ‘지강티’와 같은 걸작들이 까미유의 손에서 나왔다. 특히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손이나 발은 까미유가 전담하다시피 만들었는데, 실력과 감성이 서로 비슷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와 작품 ‘왈츠’

1886년, 언제 다시 로즈 뵈레에게 돌아갈지 몰라 불안해하고 예민해진 까미유에게 로댕은 각서까지 썼다. 로즈와 헤어지고 그녀에게만 충실한 남자가 되기로.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자신에게 헌신한 로즈를 차마 버릴 순 없었다. 그런 채로 로댕은 까미유와 둘만의 아지트를 마련해 사랑하고 창작했다. 당시 까미유도 열정적으로 창작했지만, 작품의 마지막 서명 란에는 로댕의 이름만 들어갔기에, 이 시기 그녀의 작품수가 적다.

그런데 로즈가 까미유를 찾아와 난리를 친다. 이를 목격한 로뎅은 까미유를 내버려둔 채 로즈를 따라 나선다. 로댕의 아이를 임신한 까미유가 유산하지만, 로댕은 그녀를 돌보지 않는다. 결국 까미유는 이별을 결심한다.

까미유는 로댕과 이별하고 모든 에너지를 작품에 쏟았다. 잠깐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를 만났는데, 까미유의 거절로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왈츠’다. 까미유의 걸작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재료로 복재됐는데, 까미유는 이 작품을 드뷔시에게 줬고, 드뷔시는 평생 간직했다.

하늘이 준 재능이 불행으로
 

왈츠|까미유 끌로델|1889-1905|로댕박물관.

그녀는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작품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녹여냈다. 해마다 전람회에 출품했지만, 평론가들은 로댕의 아류라고 폄하했다. 로댕의 명성은 쌓여갔고, 까미유의 존재는 점차 잊혀졌다. 급기야 까미유의 출품작이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그녀는 로댕이 꾸민 짓이라고 단정했다. 청춘도, 사랑도 다 가져갔으니 작품도 가져갔으리라고 여겼다. 그가 성공할수록 그녀의 좌절은 깊어졌고, 술 없이 잠들기 어려운 밤들이 지나갔다. 그녀는 점점 더 자신을 사회로부터 고립시켰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에 까미유는 자신의 많은 작품을 부셔버렸다.

1913년에 그녀를 그나마 지켜주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들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넣는다. 그녀의 나이 49세. 그녀는 그 이후 30년을 단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나와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1917년, 로댕은 로즈가 죽기 2주 전에 정식으로 결혼한다. 그리고 그도 몇 달 후 사망한다. 까미유가 눈을 감은 건 그로부터 26년 후인 1943년이다. 까미유는 무연고 시신들과 함께 몽파메 묘지에 매장됐다.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동생 폴은 까미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그녀에게 준 재능은 모두 그녀의 불행을 위해 쓰였다”

[참고서적] 까미유 끌로델(김이선 옮김, 마음산책),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미유 끌로델(정금희, 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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