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완벽한 타인

의사 부부 석호(조진웅)와 예진(김지수)의 집들이에 참석한 태수(유해진)와 수현(염정아) 부부, 준모(이서진)와 세경(송하윤) 부부. 여기에 애인을 데려온다더니 뒤늦게 혼자 온 영배(윤경호)까지, 남자들은 속초에서 나고 자란 40년 지기 ‘불알친구’들이고 여자들 역시 남편 덕에 오랜 관계를 맺어온 사이다.

고급 빌라에 이사 온 친구 부부를 축하하는 집들이인 만큼, 친구들은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고 때마침 개기월식까지 있는 날이라 집들이 분위기는 화기 애애 무르익는다. 오가는 칭찬과 죽마고우다운 친밀한 대화들이 온전히 진심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기분 탓일까 의심이 들던 찰나, 예진은 급작스러운 게임을 제안한다.

게임의 규칙은 단 하나. 지금부터 식탁 위에 놓인 각자의 휴대전화로 걸려오는 모든 전화와 메시지를 공개할 것. 일순간 어색한 공기가 흐르지만, 너도나도 켕길 것이 없으니 공개 못할 것도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어영부영 게임은 시작된다.

이때부터 분위기는 급반전. 지금까지 둘도 없는 사이였던 부부관계, 친구관계는 엉망진창 꼬여버린다. 앞에서는 온갖 배려와 칭찬의 말을 나누던 이들의 뒷담화, 견고하게만 보였던 부부관계의 위태로운 실상, 40년 지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은근히 행해지던 왕따, 여기에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비밀까지. 고작 두 시간 동안 휴대전화를 공개했을 뿐인데, 그간의 가식과 교양인의 가면 뒤에 숨겨왔던 지질한 민낯이 낱낱이 드러난다.

‘완벽한 타인’은 텔레비전 드라마 ‘다모’(2003)와 ‘베토벤 바이러스’(2008) 등으로 연출 능력을 인정받은 이재규 감독이 오로지 배우들의 앙상블로만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호흡이 빛나는 블랙코미디 영화다. 배우 7명 어느 하나도 뒤로 빠지는 이 없이, 한순간도 비는 호흡 없이, 딱 맞는 톱니바퀴처럼 대화와 서사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쾌감을 선사한다.

석호와 예진의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 집들이라는 한정된 시간, 7명의 배우라는 한정된 인물이 두 시간의 러닝타임을 리드미컬하게 채우는 것이 마치 합이 잘 맞는 연극 같다. 실력파 뮤지션들이 어쩌다 한자리에 모여 기막힌 즉흥연주를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극장 안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시종일관 유쾌하게 키득거리며 본 한국영화가 얼마 만인가 싶다.

순박한 역할을 맛깔나게 보여주던 유해진이 꽉 막힌 가부장을, 표독스러운 팜므파탈이 제격이었던 염정아가 지지리 궁상인 전업주부를, 오히려 지고지순한 조강지처가 어울려 보였던 김지수가 신경질적인 상류층 여성을, 신사 역할만 고수해왔던 이서진이 생양아치 연기를…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찰떡궁합을 보여준 배우들의 호연도 맛깔스럽다.

영화를 보기 전 ‘휴대전화 공개로 벌어지는 소동’이라는 시놉시스만 보았을 때는 빤한 불륜 이야기나 나오겠지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우려야말로 빤한 기우였다. ‘완벽한 타인’의 소동극은 7명 각자의 비밀을 단순히 코믹한 상황극의 땔감으로 소모하지 않는다. 계급 격차에서 오는 위계, 학벌중심사회의 패거리문화, 가부장적인 남편과 순종적인 전업주부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모순, 교양 있는 상류층의 가식, 소수자에 대한 뒤틀린 편견이 쉴 새 없이 터지는 웃음 사이로 꽤나 묵직하게 전달된다. 여러 모로 영리하고 여러 모로 올바르다.

그건 그렇고, 영화 제목이 왜 ‘완벽한 타인’일까? 영화 속 인물들은 매순간 자신들이 얼마나 막역한 사이인지를 과시하지만, 고작 두 시간의 휴대전화 공개로 그것은 말짱 거짓임이 드러난다. 그들의 ‘완벽한’ 관계는 각자의 비밀을 고이 묻어둘 때나 가능한 허약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감독은 누구나 말 못할 비밀을 가지고 있고, 가면을 쓰고 사는 게 사람살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다르게 읽고 싶다. 부부든 친구든 당연히 친밀해 보여야만 할 것 같은 관계일수록 서로 상대방을 모르는 ‘완벽한 타인’임을 인정해야한다고. 그래야 비로소 진짜 대화는, 진짜 관계는 시작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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