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에 ‘강서구 아파트 살인사건 피해자의 딸입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강서구 아파트 살인사건은 상습적 가정폭행범인 피의자(남편)가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다. 피의자는 2015년 2월 처음 신고 됐고 ‘고위험 가해자’로 분류됐지만, 경찰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폭행은 계속됐고, 피해자는 결국 살해됐다. 세 딸 또한 피의자의 무분별한 폭력 속에서 위협과 불안에 시달렸으며, 딸은 아버지에게 사형이 선고되기를 청원했다.

책 ‘혐오와 수치심’에서 지적하듯, ‘가정’이라는 공간은 가부장의 성역(城域)으로 여겨져 그 안에서 일어난 폭력에 대해 공권력은 가부장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모양새를 취해왔다. 강서구 아파트 살인사건을 비롯한 국내의 갖은 가정폭력 역시 여성 존재가 가부장 폭력의 위험에 노출돼있으며 가부장에 의해 ‘관리’되는 대상임을 사회 권력이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정폭력에 대해서라면 ‘가정’에 방점을 찍고 ‘집안’ 문제니까 적당히 해결하시라고 말하기 십상이며, 공권력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던 것을 목격한 내게는 적어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집안’이라는 공간이 그 집의 주인인 가부장 남성의 ‘권위와 질서’로 다스려지는 곳임을 사회가 묵인하는 이상, 그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구조적(위계적) 폭력으로 보아야한다.

가정이 위계와 권력으로 다스려지고 있는 한 그 공간의 ‘적임자’는 폭력을 휘두를 권력을 몽땅 취한다. 남편이자 아버지인 피의자가 가족 중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위계를 쥐고 있음을 알려준다. ‘가정’의 성립은 타인의 인권을 박탈할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 계약이 아니다. ‘가정’이 최소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맺어진 법적 관계라면, 인권을 해치는 폭력 행위가 일어났을 때 그 처벌이 더욱 엄중하지 않아야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누구 못지않게 폭력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알은 체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당사자가 그런 폭력을 말하는 것에 비극이 있고, 타인이 타인의 폭력 당함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상화의 위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은 안 된다’라고 말한다. 폭력으로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했을 때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한다고 믿으며 그렇게 외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발언한다. 그러나 우리는 폭력에 대해 얼마나 실감하고 있나.

‘실감’의 문제는 증명할 수치를 제시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난처하다. 이러한 곤란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실감’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는 폭력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폭력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폭력을 너무 ‘잘 알고’있는 상황을 초래한다. 우리는 정말 폭력을 모르는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했는가? 아직 폭력을 겪어본(행해본) 적 없다고 생각하는가? ‘폭력에 대한 실감’은 영영 겪지 않아도 좋을 폭력을 일어나지 않게 책임을 다하는 것에 있다.

사람을 때리고 협박하는 것에, 살의가 드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라. 반대의 상황에 처했을 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아서 결국 내가 죽는다면 하는 끔찍한 상상을 하라. 그런 상상을 하지 않아도 누구도 폭력으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있는 사회라면 더욱 좋겠지만….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