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과학에세이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7년 전이다. 일기 이외에 글을 써본 적이 없어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이렇게 쓰는 게 맞는지, 아무 것도 몰랐다. 글을 쓰기로 한 이유는 단순했다. 과학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느낀 과학의 신비와 감동, 재미를 전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는 것 이외에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다행히 과학에세이가 좋은 반응을 얻어 나는 큰 용기와 힘을 얻었다.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어쩌다보니 이젠 글쓰기가 직업이 됐다. 2년 전엔 오로지 글만 써서 먹고 살겠다는 무모해 보이는 결심을 했다. 아직 글 의뢰가 들어오면 황송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처음보다 글 보내는 곳이 늘었다. 글을 쓰게 하는 힘은 마감일과 원고료라는 말이 속설이 아닌 진실이라는 것도 알았다. 글 써서 핸드폰 요금과 국민연금을 내고 치킨도 사 먹는다.

하지만 몇 달 전, 흔히 말하는 슬럼프가 내게도 왔다. 과연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 글이 읽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글 쓰는 실력은 왜 이리 늘지 않고 글에 담긴 철학은 왜 이리 빈곤한가. 써야할 글을 앞에 두고 한숨 쉬는 날이 늘었다. 물론 글쓰기가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래서 짧은 글 한 편 쓰는 데 며칠씩 걸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글쓰기가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글을 쓰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면 아마 글쓰기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마감을 코앞에 두고도 책상 앞에 앉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였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도피처가 필요했던 그 순간 내 손이 책꽂이로 향했다. 그곳에 작가들이 자신의 글 쓰는 생활과 철학에 대해 쓴 책들이 있었다. 내가 겪는 문제에 해답을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책을 읽었다. 아니, 샅샅이 뒤졌다. 몇 시간 후 나는 차분해진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밤새 자판을 두드렸다. 가까스로 마감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불안했던 마음은 천천히 조금씩 괜찮아졌고 부족한 글이나마 계속 쓸 수 있게 됐다.

그날 이후 그 책들은 책꽂이에 꽂힌 적이 없다. 책상과 침대 언저리를 오가며 틈틈이 내 손을 타고 있다. 하도 읽다보니 이건 글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추동력으로 무언가를 해내려는 사람들, 하지만 잘 안 돼서 괴로운 사람들, 아니 아직 시도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하는 일을 누가 알아줄까 싶고,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성과가 없다고 느껴 일할 맛이 안 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정말? 그렇다. 그 근거를 이제부터 써보려 한다. 아, 그리고 당연히도 글을 쓸까말까 망설이는 이를 확 끌어당기는, 매력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 쓰기의 말들
| 은유 | 유유출판사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까지 뭘, 왜, 또…’라는 생각에 기가 죽는다. 내 생각의 밑천은 한없이 초라하다. 얼마나 더 읽고 더 쓰고 더 뒤척여야 저런 인식과 표현이 가능할까. (중략) 위로의 말은 자동 응답기처럼 돌아온다. 그런 사람들은 쓰지 못하는 너만 쓸 수 있는 글이 있잖아. 친구야”(119쪽)

축 쳐져서 글 쓸 엄두도 내지 못하던 때 이 대목을 읽고 힘이 조금 솟는 걸 느꼈다. 은유의 ‘쓰기의 말들’이다. 은유는 자유기고가로 시작해 사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쓰다 지금은 논픽션 작가로 여러 권의 책을 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다.

글쓰기를 배운 적 없고 등단을 통해 입문하지도 않은 데다 자유기고가로 살아온 작가의 이력 때문일 것이다. 은유는 나의 실제 글쓰기 선생님이자 롤 모델이다. 그의 모든 책을 좋아하지만 특히 ‘쓰기의 말들’은 죽비 같은 쨍한 자극이 필요할 때 찾는 책이다. 이 책은 작가가 수많은 책과 글에서 찾은 한 줄 문장과 그에 대한 짧은 이야기 104편을 엮은 것이다. 모두 쓰기와 관련한 글이라 제목도 ‘쓰기의 말들’이다.

“작가라는 자의식도 없던 때, 글이 쓰고 싶어서 무작정 글을 쓰고는 너무 유치한 거 아닌가 검열하곤 했다. 딸아이가 키우는 새우젓만 한 물고기 구피 이야기, 성남 모란시장 음식점에서 본 취객 이야기 같은 글감이 그랬다. 그 왜소하고 볼품없는 것들이 사유를 자극하고 생각의 갈래를 피워 올렸고 그래서 나는 썼지만, 정치와 사회와 역사의 거대 담론 사이에서 어쩐지 위축되곤 했다”(55쪽)

위에 인용한 두 단락은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수도 없이 하는 생각이다. 나의 롤 모델도 한때는 (아니, 그는 여전히 글 쓰는 게 어렵다고 했다) 이렇게 위축되고 자신 없어 했다니, 이런 고민이 글쓰기 실력과 상관없이 찾아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위안을 받았다. 흔하고 평범한 일상에서도 삶의 정곡을 찌르는 사유를 발견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글로 썼을 때 공감과 더 큰 사유를 불러올 수 있음 알았다.

위안과 힘을 받고난 뒤엔 어떻게든 써야 한다. 마감은 언제나 코앞에 있으니 말이다. 머리를 굴린다. ‘여섯 시간이면 충분해’ ‘아니야 이번 소재는 쉬운 편이니 다섯 시간이면 쓸 수 있어’ 결국 내가 정한 마감시간을 기어코 넘기고야 만다. 게으르다는 자책을 하기도 민망하다. 이 정도면 미루기는 내 인성으로 굳은 듯하다. 글을 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 가져서는 안 될 인성이라 죄책감이 든다.

“힘들면 도망가고 싶다. 쓰는 삶에서, 쓰는 상황에서. 술을 마시거나 하염없이 걷지만, 일시적인 기분 전환일 뿐 마음이 홀가분하지도 걸음이 자유롭지도 않다. 글 쓰는 에너지를 회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글 쓰는 것”(35쪽)

자기비하로 빠지려는 나를 건져 올린 대목이다. 그렇다. 한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부르는 경험,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묵혀둔 이야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그 느낌 알 거다. 그래, 쓰면 힘이 생길 테니 이제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돼. 노트북을 펼치고 한글 새 문서를 연다. 빈 공간을 바라보니 이런, 또 다시 막막함이 엄습한다. 이제 무얼 하면 되지.

“참으로 얄궂다. 쓰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쓰기 전엔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도 쓰고 싶어서, 써야 하니까, 쓰지 않으면 안 될 어떤 필연적 상황에서 한 문장씩 밀고 나간 흔적들이다. 그 ‘실물’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다독인다. 저번에 썼으면 이번에도 쓸 수 있다”(179쪽)

‘쓰’를 ‘하’로 바꿔 읽어보라. 당신이 무엇을 하든, 저번에 했으면 이번에도 할 수 있다.

# 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 시사인북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말만 들어도 가슴에 장대한 산맥이 솟아오르고 강줄기가 꿈틀댈 것 같은 소설들이다.

이 대하소설의 작가 조정래가 문학 인생 40년이 되던 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첫 에세이집 <황홀한 글감옥>을 펴냈다.

‘문학과 역사의 상관관계는?’ ‘예술가에게 영감이란 무엇인가’ 이런 큰 주제부터 ‘수많은 인물을 그려내는 비결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처럼 구체적 질문까지, 인턴기자 희망자들에게 받은 84가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쓰인 책이다. 꼼꼼하고 열의 가득한 답변에 저자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엿보인다. 작가의 어린 시절과 등단, 소설이 나온 뒤 생긴 에피소드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나는 이 책을 글쓰기의 매운 맛을 아직 제대로 느끼기 훨씬 전에 읽었다. 다양한 글쓰기 책 가운데 이 책이 각별한 이유는 글쓰기가 오직 ‘노동’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첫 번째 책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노동은 치열한 것을 요구할 뿐 감상적 기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노동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로 행ㆍ불행이 갈립니다. 저는 그 숨 막히는 노동의 세월을 ‘글감옥’이라고 표현했고, 그 노동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249쪽)

저자는 하루 집필량을 원고지 서른 장으로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했다. 소설을 쓰다가 아버지 임종을 못하기도 했고, 돌아가신 후엔 장례를 치르는 단 4일 동안만 쓰기를 중단했다. 더 놀라운 것은 다음과 같은 고백이다.

“저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쓰는 20년 동안 술을 한 번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고, 어떤 문인은 괴물 대하듯이 하기도 합니다”(251쪽)

글 쓰느라 주말에 놀지 못한 게 아쉬울 때가 많았는데 책을 읽은 뒤부턴 ‘황홀한 글감옥’에 갇힌 기분을 조금씩 즐기게 됐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한두 권 읽었을 뿐인데 에세이는 꼭 읽는다. 오랫동안 꾸준히 쓴 글로 독자들에게 인정받은 작가들의 삶과 생각이 내겐 소설보다 흥미진진하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조정래 작가처럼 하루 14시간에서 16시간 글 쓰는 데 시간을 바치지는 않는다. 그는 “나는 하루에 다섯 시간 쯤 책상을 마주하고 상당히 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190쪽)라고 했다. 그 역시 “매일매일 소설을 계속 써나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책은 ‘소설’을 중심으로 쓰여 있지만 ‘글쓰기’로 바꿔서 읽어도 무방한 대목이 많다.

“소설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충동. 장기간에 걸친 고독한 작업을 버텨내는 강인한 인내력. 이건 소설가라는 직업인의 자질이자 자격이라고 딱 잘라 말해버려도 무방할 것입니다”(28쪽)

그는 “육체적으로 절제하는 것은 소설가를 지속해나가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일”라는 말을 반복한다. 재능보다 체력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또, 그는 정신의 ‘터프함’도 강조한다.

“망설임을 헤쳐 나가고, 엄격한 비판 세례를 받고, 친한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고,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하고, 어느 때는 자신감을 잃고 어느 때는 자신감이 지나쳐 실패를 하고, 아무튼 온갖 현실적인 장애를 맞닥뜨리면서도 그래도 어떻게든 소설이라는 것을 계속 쓰려는 의지의 견고함입니다”(198쪽)

이들 덕분에 오늘도 나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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