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입학한 지 보름 만에 시골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당시 교육청에선 학년별로 전학생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제비뽑기 방식으로 학교를 배정했다. 이제나 저제나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 사이 두 달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5월의 학교는 한창 중간고사 중이었고 반 친구들은 중학생이 된 서먹함은 일찌감치 떨쳐낸, 서로를 이미 다 파악한 왈가닥들이었다. 나는 아직도 서툰 영어 알파벳과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0에서 1을 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정수의 덧셈 뺄셈을 배우며 한참 떨어진 진도를 더디게 따라갔다.

아마도 까만 얼굴과 경상도 사투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구 사귀는 데 서툴렀던 나에게 친구들이 먼저 다가왔다. 그들 덕분에 공부는 힘들었지만 서서히 학교생활에 적응했다. ‘아프리카 심’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갑작스런 관심이 화가 된 걸까. 사투리를 따라하며 장난치던 친구들이 어느 순간 싸늘해졌다. 말을 건네는 내 눈을 피했다. 한 아이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반 아이들에게 퍼트렸다는 걸 안 건 2년 뒤의 일이었다. 당시엔 이유를 알 수 없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심혜진.

내 옆엔 친구 한 명만 남았다. 시골 친구들과 그곳의 삶이 그립고, 외로웠다. 한 명 남은 친구에게 외롭다는 말 대신 경상도의 작은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친구들과 밤에 하던 쥐불놀이, 겨울날 빈 논에서 연날리기, 바닷가 수영, 아름드리 벚꽃길... 친구는 그곳에서만 팔던 ‘진해콩’이라는 과자를 궁금해 했다.

“고소하고 달콤하지. 볶은 콩처럼 딱딱하고.” 나는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었다. 처음엔 돼지고기 대신 고등어를 구워 상추에 싸먹는 ‘진짜’ 그곳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나중엔 한 번도 먹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거기 사람들은 젓갈을 좋아해서 김밥에도 젓갈을 넣는다.” “두꺼운 김이 있는데 그걸 통째로 튀기면 바삭하고 정말 맛있어.” 친구는 때론 인상을 쓰고 때론 입맛을 다시며 호기심을 보였다.

거짓 소재는 금방 바닥났다. 할 이야기가 없었다. 기운이 쭉 빠진 내 입에서 마지막 남은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 하나가 흘러나왔다. 바닷가에서 홍합을 잔뜩 따다가 큰 통에 쪄먹던 일이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에 나가면 홍합과 굴이 지천이었다. 놀다 지치면 바위에서 홍합을 떼어 자루에 담이 집에 가지고 왔다. 큰 솥에 물 이외엔 아무 것도 넣지 않고 홍합이 입을 벌릴 때까지만 삶았다. 뿌옇게 우러난 국물을 홍합 껍데기로 퍼 먹다보면 쟁반엔 껍데기가 수북이 쌓였다. 어린 입맛에도 가을이 올수록 홍합이 달고 맛있어진다는 걸 알았다. 그 흔하디흔했던 홍합탕이 간절히 먹고 싶었다.

나는 부모님을 졸라 소래시장에서 홍합을 한 자루 사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홍합탕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홍합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퍼석, 부서졌다. 어? 이게 아닌데. 다시 한 번 먹었다. 아, 죽은 홍합의 맛은 이런 거구나. 삶은 정말 내 맘대로 안 되는구나, 이 죽은 홍합살처럼 팍팍한 거구나. 옛날 그 바다와 홍합탕 맛이 그리워 눈물이 찔끔 나려는 걸 꾹 참았다. 그날 우리는 홍합을 절반도 먹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는 먹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고향의 맛’이란 게 내게도 있다면 아마 홍합탕이 첫 번째가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난 그리운 고향의 맛을 열두 살 이후로 다신 맛보지 못했다. 살아 있는 자연산 홍합으로 맛은 흉내 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원하는 건 혀로 느끼는 맛이 아닌 것 같다. 어린 날의 나, 자연속의 삶, 그리고 일상의 팍팍함을 몰랐던 이전의 삶에 대한 그리움. 홍합의 맛이 제대로 무르익는, 오직 가을에만 느끼는 쓸쓸한 낭만이기도 하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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