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로컬 클럽들을 지켜줘야 진정한 음악도시”
“인천의 로컬 클럽들을 지켜줘야 진정한 음악도시”
  • 장호영 기자
  • 승인 2018.10.29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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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30주년 맞은 LP카페 ‘흐르는 물’ 안원섭 대표

“아버지가 소리를 하다 대중가요를 하시고, 형은 기타를 치는 등 소리꾼 집안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집에 오래된 전축과 레코드가 있었다. 그것이 내 음악적인 모티브가 됐다. 20대 초반 군대를 가기 전 신포동에 있던 음악카페 ‘용카페’에서 음악을 틀며 나중에 나이가 들면 이런 카페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군대 갔다온 뒤 돈을 모아 엘피(LP)카페 문을 열게 됐다”

지난 23일 LP카페 ‘흐르는 물’(중구 관동3가 3-7)에서 만난 안원섭(58) 대표는 옛날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부평에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다녔던 안 대표는 20살이 되고 서울로 대학을 다니게 되며 다시 인천과 연을 맺었다.

건축을 전공했던 안 대표는 교사를 생각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 서점과 레코드점을 함께 운영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서점과 레코드점 대형화 추세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는 선배의 충고로 마음을 접고 남동구쪽에 보세옷가게 문을 열었다. 옷을 팔아 돈을 모은 안 대표는 29살이 되던 89년 1월 3일, 드디어 20대 초반 마음을 먹었던 LP카페의 문을 관동에 열수 있었다.

첫 카페 이름은 ‘흐르는 것이 어찌 물뿐이랴’ … 현재 LP 5000장 보유
 

‘흐르는 물’ 안원섭 대표.
‘흐르는 물’ 안원섭 대표.

첫 카페의 이름은 1970년 대표적 참여시인인 정희성씨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있는 시구 ‘흐르는 것이 어찌 물뿐이랴’이었다. 그러다 이름이 너무 길다는 의견이 많아 ‘흐르는 물’로 이름을 줄이고 지금까지 사용해오고 있다.

개인이 모았던 LP로 첫 문을 연 카페는 규모가 작은 곳이었다. 그렇게 시작했던 카페가 두 번의 장소를 옮기며 점점 커졌고, 현재 카페에는 5000장의 LP가 소장돼있다.

안 대표는 첫 카페를 열고 매주 월요일을 LP 사는 날로 정해 정기적으로 수집했다. 그렇게 점점 LP를 모으다, 1992년쯤 일본을 오가며 재즈 음반을 모으던 선배에게 “외국에서 점점 LP가 사라지는 추세라 한국도 그럴 거 같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여 지금의 5000장을 모을 수 있었다.

LP는 현재 시디(CD)와 MP3의 등장으로 사장됐다. 특별판 정도로 가끔 발매되는 경우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안 대표도 요즘은 LP를 지인들이 선물해주는 경우에만 비치할 수 있다고 했다.

안 대표는 “DJ들이 멋을 내려고 LP를 넣었다 뺏다 한다고 하는데, 먼지를 털어주기 위해 필요한 동작”이라며 “계속 닦아줘야 음악이 잘 나오기 때문에 관리하는 게 만만치 않다”고 했다. 이어 “아는 지인이 LP 카페를 열었다가 먼지 관리 때문에 문을 닫는 일도 있었다”고 귀뜸했다.

첫 카페 문을 연 후 장사가 처음부터 잘 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옷을 팔아 번 돈으로 몇 년동안 카페 운영을 버틸 정도는 됐다. 매월 1만원을 내고 커피와 술을 무료로 제공받는 후원자들의 도움도 있었다. 이런 후원자들이 30명이면 한 달 월세는 충당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안 대표는 “워낙 노래하고 기타치는 것을 좋아하고 시 쓰는 것도 좋아하다 보니, 주변에 문화예술 관련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아 점점 인천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했던 것 같다”며 “초창기에는 돈을 알아서 내는 것이었고 외상도 많아 어려웠지만, 매월 후원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첫 공연은 1989년 열었던 안 대표의 콘서트
 

오래된 감성이 묻어나는 LP카페 ‘흐르는 물’의 모습.
오래된 감성이 묻어나는 LP카페 ‘흐르는 물’의 모습.

공연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첫 카페는 규모가 작다보니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 제물포에서 작업실이 있는 큰 규모의 미술카페를 운영하는 후배들이 홍보도 할겸 자신들의 카페에서 공연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고, 안 대표는 그렇게 첫 공연을 하게 됐다.

1989년 5월 27일 ‘안원서비 사는 연습 중에서 시 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은 몸짓 하나’라는 이름의 첫 콘서트였다. 안 대표의 이름을 땄고, 생일 날을 콘서트 날로 정해서 어머니를 비롯해 주변의 지인들을 초청했다. 두 번의 공연을 했는데, 입장료를 받긴 했지만 음료수와 티셔츠 한 벌씩을 주는 선물 공세로 남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안 대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재밌는 공연이었다고 회상했다.

첫 콘서트 포스터는 아직 카페에 보관하고 있다. 포스터에는 안 대표가 좋아하는 가수 조동진씨와 한대수씨, 노벨문학상을 탄 마르케스 소설가(100년 동안 고독), 수필가 전혜린씨가 담겨 있다. 최초의 제독작가 전혜린씨는 1955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작품 번역 활동을 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고, 1966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수필집을 썼다.

안 대표는 LP카페를 몇 년만 하다가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 건축미학을 공부하고, 전혜린 작가의 발자취도 쫓을 겸 독일로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독일이 통일이 되면서 많은 혼란을 겪는 시기여서 유학은 좌절됐다. 그러다 29년 만인 2017년 마침내 전 작가가 머물렀던 뮌헨에 갔고, 전 작가가 살던 집에도 방문해 소원 성취를 했다.

첫 카페에선 1991년 1월 나와야 했다. 두 번째 카페는 그나마 첫 카페보다 규모가 커서 타악기 연주자 고(故) 김대환씨, 가수 이주원씨와 전마리씨 등의 공연을 부정기적으로 유치했다. 2001년 1월 세 번째로 문을 연 카페가 지금 ‘흐르는 물’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의 장소에서 부정기 공연을 이어 가다, 무대가 없어 한 동안 공연을 중단했다. 그러다 서울 홍대의 한 라이브 클럽에 갔다가 관객이 몇 명 없는 상황에서도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카페에서 공연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다.

그렇게 2013년부터 포크음악을 하는 가수 정형근씨와 김동환씨를 무대에 올렸고, 소리새의 가수 황영익씨의 독집 쇼케이스 등을 이어갔다.

30주년 콘서트 무사히 마쳐
 

지난 13일부터 6일 동안 열었던 30주년 콘서트의 공연 모습.(사진제공 흐르는물)
지난 13일부터 6일 동안 열었던 30주년 콘서트의 공연 모습.(사진제공 흐르는물)

안 대표는 지난해부터 올해 30주년 맞이 콘서트를 기획했다. 정확히 따지면 2019년 1월 3일이 30주년이 되지만, 1월이 겨울이기도 하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10월에 30주년 공연을 하고 싶었다. 30주년 콘서트가 열린 10월 13일은 카네이션을 제외하고 안 대표가 처음으로 꽃을 샀던 날이기도 하다.

▲13일 김동환 밴드 ▲14일 강허달림 ▲17일 멍홀치맥, 졸자야, 이재상 ▲18일 정유천 블루스밴드 ▲19일 김형섭의 콰르텟 ▲20일 소프라노 백혜숙 씨 등 5명의 공연 등이 30주년 초청콘서트로 진행됐다. 이중 일부는 인천문화재단으로부터 후원도 받았다.

안 대표는 “주변에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 때문에 30주년 콘서트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포스터를 매번 후원으로 제작해주는 출판사, 30주년 컵을 제작하는 데 도움을 준 분들 모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장미꽃을 선물로 주신 분도 있었는데, 카페를 찾아온 손님들이 한송이씩 전달해줬다”며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 행복했고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한, 31주년이 되는 2019년에는 한국 포크계의 숨은 고수들을 모으는 공연을 유치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끝으로 안 대표는 인천시가 지역의 작은 전문 공연장이나 클럽 등 문화예술 자산이 잘 보전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남겼다.

“타 지역에서 인천을 오면 우리 카페 뿐 아니라 여러 로컬 클럽 등 문화공간을 보면서 부러워한다. 얼마 전 지원이 없어서 많은 음악 자산을 가진 분이 인천을 떠나는 것을 목격해 너무 화가 난 적이 있었다. 큰 행사를 유치하고 이런 것을 우선하는게 아니라 기존에 유지되고 있는 작은 클럽들을 더 신경 써주고 지켜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음악도시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