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라 모더존 베커

단순화한 형태, 아름다운 색채

호박 목걸이를 한 반신 누드 자화상|1906|바젤미술관

붉게 물든 얼굴이 생기가 넘친다. 오른 쪽을 응시하며 잔잔한 웃음을 띤 표정, 파란 하늘과 꽃나무를 배경으로 커다란 호박 목걸이를 걸고 있는 여인. 선홍색 유두와 유두 모양의 꽃을 들고 건강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이 그림은 파울라 모더존 베커(1876-1907)가 그린 ‘호박 목걸이를 한 자화상’이다. 파울라는 서양 미술사를 통틀어 최초의 누드 자화상을 그린 여성 화가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과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고갱의 그림 속 원시 여인들은 불안한 눈빛, 수동적 표정, 남자의 시선에 갇힌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면, 파울라의 누드 자화상은 타인의 시선을 갈구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 스스로 기쁨에 차 있으며, 내숭을 떨거나 농염해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게 나야’라고 일부러 센 표정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도 건강한 아름다움과 순수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단순화한 형태에 색채가 아름답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사람들

파울라는 1876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여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6세 때 런던에 있는 고모 집에 보내지고, 그때 처음으로 반년동안 미술교육을 받았다. 그 후 집으로 돌아와 화가 베른 하르트 비간트에게 미술교육을 받았고, 이후에는 베를린 화가 미술연합의 미술학교에서 2년간 공부했다. 1897년 보릅스베데의 화가마을에 정착했는데, 이 예술인 마을에는 당대에 유명한 프리츠 마켄젠, 오토 모더존, 하인리스 포겔러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량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이곳에서 그녀는 프리츠 마켄젠의 수업을 들었다.

이 수업에서 그녀는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 호프를 만나 ‘절친’이 된다. 동료 화가인 하인리스의 초대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이 예술인 마을을 방문했다. 릴케는 파울라를 처음 만난 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그건 아마 완전한 일치감인데, 말하자면 누군가의 우연한 조우로 각자 성장하는 것이다. 끝을 예견할 수 없는 긴 길을 걸어 내려가 우리는 이 영원의 순간에 닿았다. 놀라움에 몸을 떨며 우리 두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신의 존재 바로 앞의 입구에 도달한 것처럼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 느낌은 그만 느낀 것이었나 보다. 파울라는 보릅스베데의 유명한 풍경 화가였던 오토 모더존과 결혼했고, 릴케는 클라라와 결혼한다. 그것도 같은 해에. 오토 모더존은 파울라보다 열한 살 연상이고, 사별한 배우자 사이에 딸이 한 명 있었다. 릴케는 그를 ‘독일적이고 북방적인 자기 고유의 세계를 가진 과묵하면서도 심지 굳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릴케와 클라라는 파울라가 죽는 날까지 교류하며 서로 비빌 언덕이 돼준다. 그림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클라라 릴케 베스트호프’는 파울라가 그린 릴케와 클라라의 초상화다. 클라라도 파울라의 초상을 청동 작품으로 남겼다.

릴케의 초상화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염이 그려져 있고, 독특한 건 눈동자다.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 아마도 범부의 것과 다른, 깊은 곳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시인을 표현하려한 것 같다. 그녀의 다른 작품에 표현된 눈과는 매우 다르다. 붉은 장미를 들고 있는 클라라의 초상화는 왠지 우울하고 지쳐 보인다. 조각을 배우겠다고 파리까지 와서 어렵사리 로댕의 작업실에 들어갔지만 하루 종일 석회 반죽만 하고 있을 때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다고 그만 둘 수도 없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예술가의 한숨과 고뇌가 느껴진다.

좋은 그림 세 점을 그릴 수 있다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1906|루트비히 로젤리우스 컬렉션, 클라라 릴케 베스트호프|1905|쿤스트할레 미술관

파울라는 일기장에 보릅스베데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놀라운 나라, 신들의 나라” 이곳에서 남편의 지원도 받고 개인 작업실에서 비교적 안정적 미술활동을 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안락한 생활이 그녀의 창작활동에는 자극이 되지 못함을 느꼈다. 게다가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최고로 평가하는 보릅스베데 예술가 집단에서 그녀의 새로운 시도 즉, 단순화한 형태와 과감한 색채는 유치한 것으로 치부됐다. 남편과 그의 동료 화가들은 충고랍시고 그녀의 작품에 이래라저래라 말이 많았고, 그녀는 생각이 많아진다.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가 그녀 그림의 핵심이었는데, 전통을 고수하려는 독일에서 그것을 이해받기엔 시대를 너무 앞섰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걸까. “내가 아는데 나는 아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픈가? 축제가 길다고 더 아름다운가? 내 삶은 하나의 축제, 짧지만 강렬한 축제다. 마치 내가 나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에 모든 것, 전부를 자각이라도 해야 하듯이 나의 감각은 점점 더 예리해진다. (중략) 그러니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이 한 번 피어나고 좋은 그림 세 점을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손에 꽃을 들고 머리에 꽃을 꽂고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나겠다”(파울라의 일기 중)

파리에서 자신만의 화풍을 찾다

예술가로서 신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그녀의 열망은 파리로 향하게 했다. 그녀는 1900년부터 1906년까지 모두 네 번 파리에 체류하면서 세잔과 고갱의 그림에 충격을 받는다. ‘엄청난 소리를 내는 힘이 있는 자극적인 색’을 쓰고 싶었던 내면의 소리와 파리에서 받은 문화충격이 합쳐져 그녀는 드디어 그녀만의 화풍을 찾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날개를 단다.

파리에서 미술아카데미 수업을 받는 것은 물론, 날마다 루브르에 갔다. 특히 고대 이집트 예술에 크게 감화한다. “나는 지금까지 고대를 아주 멀게 생각했다. 물론 그 자체를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근대 미술과의 연결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제 나는 그것을 찾았다. 이것은 진보라고 생각한다. 형태에 들어있는 위대한 단순함은 놀라울 정도다”(파울라의 일기 중)

남편 모더존은 자신보다 앞서 나가는 부인이 벅차기만 했다. “나의 부인은 아름다운 사슴이다. 그녀는 철두철미한 화가다. 그녀의 색채감각은 여기 있는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현재 나는 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경주를 한다”

긍정적 경쟁관계는 서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소모적 경쟁은 서로 지치게 한다. 자신의 품 안에 그녀를 가두고 싶어 하는 그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그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된다. 남편과 이별을 결심하고 파리에 머무는 그녀지만, 외롭고 가난한 생활에 파리까지 찾아온 남편의 모습에 흔들렸는지 다시 만난다. 몇 개월을 같이 지내며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잉태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 아쉬워라” 동백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동백나무 가지를 든 자화상|1907|에센의 폴크방 미술관

파울라는 누드 자화상 여섯 점을 그렸는데, 마지막 작품이 ‘동백나무 가지를 든 자화상’이다. 고대 미라의 영향이 느껴지는 단순화한 얼굴 형태와 어둡고 강렬한 색채는 보는 이를 얼어붙게 만든다. 불과 1년 전에 그린 자화상의 생기는 사라졌다. 이게 마지막이란 걸 알았던 걸까. 동백꽃은 봉우리 째 뚝 떨어지는 꽃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이를 낳고 며칠 만에 후유증으로 숨을 거둔다. 나이 31세였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에 안타까운 탄성이 새어 나온다. “아, 아쉬워라”

그녀는 짧은 생애에 작품 1800여점을 남겼다. 생전에 판매한 그림은 고작 3점. 사후 재평가되면서 여성화가 최초로 이름을 건 미술관이 개관한다. 브레멘에 위치한 파울라 모더존 하우스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밀도 높은 성찰과 사물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로 대상들을 표현했다. 프리다 칼로, 앨리스 닐, 신디 셔먼, 키키 스미스 등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그 뒤를 이었다. 시대를 앞선다는 건 먼저 부딪치고 깨지는 거다. 깨지고 피 흘린 자리에 길이 난다. 파울라는 여성 예술가들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길을 내준 셈이다.

“그대는 이해한다. 가득한 과일들을. 그대는 과일들을 접시 위에 얹어 놓고 그 빛깔로 그 무게를 가늠했다. 또한 과일을 바라보듯이 여인들과 아이들을 바라보았으며 그들은 그처럼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와 그 존재의 형태가 됐다”(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파울라 모더존 베커를 위한 진혼곡’ 중에서)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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