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은 친정에서 보냈다. 친정에선 작년부터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엄마는 한과나 약과, 명태포 같은 음식을 처리하지 못해 난감해했다. 어느 해 설에는 냉동실에 있는 멀쩡한 대추를 놔두고 새로 사기도 했다. 차례상엔 늘 새 음식만 올려야한다는 법도 때문이다.

상의 끝에 식구들이 잘 먹지 않는 것들을 빼기로 했다. 두부전이 사라지고 나중엔 삼색 나물도 빠졌다. 관습대로 빼곡하게 채워지던 차례상이 조금씩 헐거워지니 차례라는 형식 자체가 무겁고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결국 음식을 줄이기 시작한 지 10년 만에 차례상이 사라졌다.

ⓒ 심혜진.

당연히 명절 풍경도 바뀌었다. 명절 몇 주 전부터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고, 몇 차례에 걸쳐 장을 보고, 제기를 꺼내 닦고,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의 노동량이 확 줄었다. 나는 전을 부치지 않아도 됐다. 집 안에 기름 냄새 좔좔 흐르던 느끼한 명절이 샐러드로 상큼, 불고기로 든든해졌다. 잔치음식이 쌓여 있지 않으니 먹어 치워야한다는 부담도 없었다. 식구들과 산책을 나갔다가 햄버거를 사먹었고, 출출한 밤엔 배달음식도 시켜먹었다. 무엇이든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었다. 불필요한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니 자연히 설거지도 줄었다. 비용도, 힘도 덜 드는, 가벼운 가을바람 같은 추석이었다.

명절을 보내고 집에 돌아온 날,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것을 빠트린 듯 허전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랑스런 조카와 헤어져서? 식구들 떠난 집에 혼자 휑하게 남겨진 엄마가 걱정돼서? 둘 다 아닌 것 같았다. 이 허전함의 실체를 저녁이 돼서야 알았다. 바로 ‘전’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친정에서든 시댁에서든, 내가 기억하는 모든 명절에 전이 있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에도 밥상에 오른 동태전 덕분에 명절 기분을 아쉽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추석은 전이 없는 첫 명절이었을 뿐 아니라 애증의 대상이던 전에 애틋한 그리움을 느낀 최초의 명절이기도 했다.

허전함의 실체를 알고 나니 이내 허탈해졌다. 하고많은 날 중에 고작 80번 보냈을 뿐인 명절, 그 기억과 관습이 내 몸과 마음 여기저기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동태전으로 형상화된 기억의 힘이 무서웠다. 나 하나도 이럴진대 공동체 구성원이 공유하는 집단기억이야 말해 무엇 할까. 힘들고 번거롭고 복잡한 차례 문화가 왜 이리 굳건하게 이어지고 있는지, 명절문화를 바꾼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이 돼 막막했다.

며칠 전 <동아일보>에 눈에 띄는 기사가 실렸다. 퇴계 이황의 17대 종손이자 유교철학 연구원인 이치억씨의 인터뷰 기사였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고 성묘만 하는데 벌초는 업체에 대행을 맡겼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 예에는 원형이 없어요. 처음부터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마음을 따라 하다 보니 어떤 시점에 정형화된 것이죠. 우리가 전통이라고 믿는 제사도 조선시대 어느 시점에 정형화된 것인데 그게 원형이라며 따를 필요는 없다고 봐요. 형식보다 중요한 건 예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에요”

본질은 빠지고 형식만 남은 차례문화가 오히려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건 아닌지. 다짐한다. 이제 다시는 명절에 동태전 따위 그리워하지 않겠다. 동태전은 각자 먹고 싶은 날 먹는 것으로!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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