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간결하고 강렬하다. 순정만화에나 나올 얼굴에 도발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그림은 배경도 없고 디테일도 없고, 심지어 색도 단조롭다. 관람자를 응시하는 여자의 눈빛이 당당해 외려 관람자를 대상화한다. 모델과 관람자 사이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 그림은 에곤 실레(1890-1918)가 그린 ‘검은 스타킹을 신은 발리 노이질’이다. 발리는 에곤이 그녀를 떠나버리기 전까지 그의 모델이었으며 연인이었다.

클림트와 우정을 나누다
 

검은 스타킹을 신은 발리 노이질(에곤 실레, 1913, 개인 소장)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제국 철도청 고급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두 누이와 여동생과 함께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기차를 보고 자라서인지 펜을 쥐기 시작하면서부터 기차나 철도를 그리며 놀았다.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 그의 아버지가 스케치북을 찢어버리는 일도 많았다.

그의 나이 15세 때 아버지가 매독에 의해 사망한다. 아버지는 중추신경을 파고든 매독 균에 의해 심한 정신착란 증상을 보였고, 이런 발작을 바라본 에곤은 성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 감정은 그의 예술적 근원이 된다. 그는 철도공무원이 되길 바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06년에 빈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한다. 빈 아카데미는 클림트도 한때 다녔고, 히틀러가 재수 끝에 낙방해 가지 못한 곳이다.

창의적 열정에 가득 찬 에곤은 전통적 방법을 고수하려는 아카데미와 갈등했다. 그를 가르치던 그리펜케를 교수는 급기야 그에게 “사탄이 너를 나의 반에 토해놓았다”라고 고함을 질렀고, 결국 그는 1909년에 아카데미를 떠나 뜻이 맞는 동료들과 ‘신예술가그룹’을 결성한다.

이미 거물인 클림트 주변을 서성이던 에곤에게 그를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그림을 처음 본 클림트는 “내가 그린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라고 말하며 단박에 천재의 탄생을 알아봤다. 클림트는 그의 그림을 직접 사주기도 하고 서로 그림을 맞교환하기도 했으며 그를 후원해줄 사람도 연결해준다. 에곤은 클림트의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이내 독자적 화풍을 찾는다. 17세의 그와 45세의 클림트는 이렇게 만나 공교롭게 같은 해에 사망할 때까지 우정을 나눈다.

예술인가 외설인가? 핍박받는 예술가
 

죽음과 소녀(에곤 실레, 1915,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클림트는 자신의 모델이었던 발리를 그에게 소개해줬고, 그렇게 만난 둘은 첫눈에 반해 동거한다. 21세의 그와 17세의 발리는 그렇게 만났다.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던 둘은 빈을 떠나 크루마우 지방으로 이사한다. 하지만 그들의 무질서한 생활을 비난한 동네 주민들의 원성에 주변 도시 노일렝바흐로 다시 옮긴다.

이곳에서 소녀들의 누드를 그리던 에곤은 소녀를 유괴했다는 주민 신고로 유치장에 갇힌다. 유괴 혐의는 무죄를 받지만, 조사 나온 경찰에 의해 아틀리에에 있던 수십 점의 스케치가 청소년을 타락시키는 포르노물로 간주돼 3일간 징역형을 살고, 그림 한 점이 불태워진다. “예술가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은 싹이 트는 생명을 죽이는 살인행위다”라고 그는 항의했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그는 핍박받는 예술가로 유명해진다.

“나는 내가 에로틱한 스케치나 수채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작품이다. 나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으며, 그 작품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내 견해를 지지해줄 것이다. (중략) 그러나 타락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어른들은 그들이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얼마나 타락해있었는지, 얼마나 성적 충동에 시달렸는지를 잊어버린 것일까. 어른들은 자신들이 아직 어렸을 때 무서운 욕정이 급습해 괴로웠던 기억을 잊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로 인해 정말 무섭고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성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는 한, 성에 대한 번민으로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그의 옥중일기 중)

에곤이 예술인지 외설인지 논란이 되는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다. 여자, 남자, 어린이뿐 아니라 풍경, 초상화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회화가 진실 즉, 본질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강박이 수많은 자화상을 탄생시켰다. 그의 자화상은 비틀리고 잘리고 일그러져있다. 미화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고 해체시킴으로써 ‘나’라는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머릿속에 각인된 성과 죽음을 고민했다. 감추고 싶은 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누드화는 관능적이기보다는 불편하다. 자화상도 누드화도 그의 그림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한결같다. 해체하고 드러내어 본질에 다가가려했다는 것.

‘죽음과 소녀’-모델이자 연인인 발리와 이별
 

가족(에곤실레, 1918,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빈으로 돌아온 그는 발리를 모델로 많은 작품을 그렸다. 그에게 최고의 모델이자 헌신의 아이콘이었던 발리는 한순간 이별을 통보받는다. 동거한 지 4년 만이다. 1915년, 그는 중산층 집안의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한다. 그는 발리에게 ‘결혼하더라도 관계를 지속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발리만큼 그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채고 표현해줄 모델은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아니면 너무 미안해 붙잡는 척이라도 하는 시늉이었는지 모른다. 어찌됐든 그의 말을 들은 그녀는 뒤도 보지 않고 떠나버린다. 발리는 종군 간호사로 지원해 전장에서 사망한다.

‘죽음과 소녀’는 그가 발리와 이별하고 그린 그림이다. 이별을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그림 속에 시체처럼 앉아있는 남자는 에곤 자신이고, 안겨있는 여자는 발리다. 소녀는 헤어지기 싫은 듯 남자를 껴안고 있다. 남자의 눈은 빛을 잃었다. 남자의 마음은 이미 식어버렸다. 소녀는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간 걸 도덕적으로 탓 할 수 있을까. 껍데기만 남아서 같이 지낸들 그게 과연 누구를 위한 의리가 될까. 사랑이, 감정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세상 절반의 근심은 사라질 꺼다.

‘가족’ - 그가 꿈꾸던 가족의 모습

에디트와 결혼한 에곤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물론 전쟁 중이라 어수선했지만 그 와중에 전시도 열었고 대성공을 거둔다. 그는 부인을 모델로도 그림을 그렸다. 도발적 포즈의 발리를 그렸던 것과는 다르게 대부분 우아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 유럽을 휩쓴 스페인 독감으로 결혼 3년 만에 에디트가 죽는다. 그것도 임신한 채로. 그녀의 임종을 지키며 그녀의 마지막 장면을 스케치로 남긴 그도 3일 후 같은 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의 마지막 유화 작품 ‘가족’은 그녀의 임신을 알고 행복한 가족을 꿈꾸며 그린 것이다. 그의 수많은 자화상에서 보이던 뒤틀림이나 기괴한 손발 잘림이 없는 평온한 그림이다. 맨 뒤에서 가족을 품고 있는 자세가 자신감 넘친다. 아이는 해맑은 얼굴로 엄마 다리 사이에 얼굴을 내밀고 있고, 엄마는 평온한 얼굴로 앉아있다. 세 사람의 구조는 안정적이고 평화롭다. 그가 꿈꾸던 가족의 모습이다.

28세에 요절한 천재 화가 에곤 실레. 짧은 생애 동안 그는 유화 300여점, 수채화와 데생 2000여점을 그렸다. 마치 그의 생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던 것처럼.

[참고 서적] 에곤 실레(감수 박서보ㆍ오광수, 도서출판 재원)
에곤 실레를 회상하며(아투아 뢰슬러, 미디어 아르테)
에곤 실레 에로티시즘과 선 그리고 비틀림의 미학(박덕흠, 도서출판 재원)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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