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커셋과 에드가 드가

검은 옷을 입고 오페라 관람석에서|메리 커셋|1880|보스톤 파인아트 뮤지엄(왼쪽). 루브르에서 메리 커셋|에드가 드가|1880년경|개인 소장(가운데). 카드를 손에 쥔 메리 커셋의 초상|에드가 드가|1884|워싱턴 스미소니언 연구원 국립 초상화 박물관(오른쪽).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오페라 안경을 들고 관람석에 앉아 뭔가를 보고 있다. 멀리서 그녀를 훔쳐보는 남자가 있다. 공연 관람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오페라 극장을 찾은 19세기 파리 부르주아 남성의 흔한 모습이다. 옆에 앉은 여인은 일행이 아닌가? 연인의 앞을 가로막으면서까지 몸을 쑥 빼고 노골적으로 보는 폼이 무례하다. 은근한 풍자가 매력적인 이 그림은 메리 커셋(1845-1926)의 ‘검은 옷을 입고 오페라 관람석에서’라는 작품이다. 이 시절 남자 화가들이 그린 여자의 모습은 주로 가슴이 파인 드레스에 화려하게 치장한, ‘보이는 존재’인데 메리가 그린 이 여인은 ‘보는 존재’다.

메리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전에 합류했는데, 미국 출신 화가 중 유일하다. 마네, 모네, 르노아르, 피사로 등 유명한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서 활동한 여성 화가는 단 세 명. 마네의 동생과 결혼한 베리트 모리조, 동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의 아내 마리 브라크몽, 마지막으로 독신녀 메리 커셋이다. 여성의 미술활동이 쉽지 않은 그 시절, 유일하게 화가 남편이나 가족을 두지 않고도 성공한 화가라 할 수 있다.

메리는 미국 피츠버그 근교 재력가 집안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7세부터 당시 상류층에 유행이던 유럽여행을 4년간 했다. 이 덕택으로 그녀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이후에는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까지 4개 국어를 섭렵한다. 11세에 파리 국제 박람회에서 본 쿠르베의 그림에 깊이 감동한 그녀는 화가가 되리라 맘을 먹는다.

그 결심을 들은 그녀의 아버지는 “차라리 네가 죽는 것이 낫겠다”라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15세에 펜실베이니아 아카데미에 입학, 4년간 미술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이미 유럽 대가들의 그림을 경험했기에 아카데미 교육은 진부하게 느껴졌다. 졸업을 앞두고 기어이 파리로 간다.

루브르에서 작품들을 모사하고 장 레옹 제롬에게 개인 레슨을 받으며 실력을 쌓아갔다. 무명의 화가가 타국에서 이름을 알리거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살롱전’에 작품을 내 당선되는 것. 메리는 처음엔 당선이 될 만한 즉, 심사위원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다. 그녀의 작품이 선정되기도 하고 탈락되기도 하면서 그녀는 더 이상 당선에 연연하지 않는다. 외려 “나는 이제 심사위원의 의견 없이도 독자적으로 작업할 수 있다. 나는 누가 과연 진정한 스승인지도 알았다. 마네, 쿠르베, 드가가 바로 그들이고, 틀에 박힌 예술은 이제 싫다. 나는 새로 현실을 시작한다”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간다.

스승이자 연인, 동지였던 ‘드가’

베리트 모리조에게 마네가 있었다면, 메리에게는 드가가 있었다. 메리는 드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고 충격에 빠져 친구이자 콜렉터인 헤브마이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뷸러바스 오스망 화랑 창문에 전시된 드가의 파스텔화를 처음 보았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나는 내 코가 납작해질 정도로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그의 작품에 열중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을 바꿔났어요. 난 예술을 보았고 곧 나는 내가 본 그것을 원하게 됐습니다”

드가 역시 그녀의 작품 ‘코르티에 부인의 초상’을 보고 “누군지 몰라도 나와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작품만 보고도 서로 상대방을 알아본 것이다. 여성혐오로 널리 알려진 드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과 도움을 준다. 수잔 발라동의 그림도 매입해주며 그녀가 화가의 길을 갈 수 있게 그녀의 스승이 돼주었고, 메리와는 죽을 때까지 스승이자 연인, 동지적 관계를 유지한다.

상대방의 작품에 경외심을 가지고 때때로 공동작업도 하며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어찌 ‘썸’이라 불릴만한 일이 없었겠는가. 둘은 사소하거나 심각한 문제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며 드가가 죽을 때까지 40여년 서로 곁에 남았다.

드가가 메리를 그린 그림이 있다. 먼저 ‘루브르에서 메리 커셋’은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메리의 뒷모습이다. 뒤에 앉아서 전시 도록을 읽고 있는 여자는 언니 리디아다. 다른 그림은 ‘카드를 쥐고 앉아있는 메리 커셋의 초상’인데, 메리는 이 그림을 매우 부끄러워했다. 오죽하면 판매상에게 ‘이 작품의 모델이 누군지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 두 그림을 보고 드가가 ‘밀당’의 대가이거나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세련되게 그렸다가 품위 없이도 그렸다가, 마치 ‘다가오지 마, 멀어지지도 마’ 하는 것 같다.

나이가 비슷하고 사는 집도 가까웠던 베리트와 메리는 둘 다 좋은 집안과 인상파에 몸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으로 통하는 게 많았다. 경쟁자이자 친구이기도한 둘은 마네, 드가와 함께 어울리며 때로는 모델이 돼주기도 하고 서로 상대방의 작품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메리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미국에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다. 자신도 많은 작품을 매입했고, 주변 인맥을 이용해 미국 콜렉터들에게 많은 그림을 팔아줬다. 미국 미술관에 프랑스 인상주의 그림이 많이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메리는 자신의 그림을 홍보하거나 판매하는 데 열을 올리지는 않았다.

섬세한 감각으로 감정을 읽다
 

엄마와 두 아이들|메리 커셋|1906|개인 소장.

당시 여자가 그릴 수 있는 주제는 한정적이었다. 가족이 아니면 남자를 모델로 그릴 수 없었고, 메리는 결혼하지 않아 남편도 없었다. 그래서 자매들과 조카들이 그림에 등장한다. 모델이 돼주었던 언니 리디아가 병으로 사망하자 큰 슬픔에 빠진 메리는 허전한 마음을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 시리즈를 그리며 달랬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대부분의 그림이 이 시기인 1880년대에 그려졌다.

그녀가 그린 일련의 시리즈는 다른 어느 작가의 작품들과도 확연히 구별된다. 굉장히 촉각적이다. 아이의 따듯한 살결이 닿는 느낌이다. 그래서 마음이 따듯해지다가 때론 울컥해지는 작품들. 유명한 그림이 많지만, 나는 이 그림을 특히 좋아한다. 엄마의 시선은 작은 아이를 향해있고, 작은 아이의 시선은 큰아이를 향해있다. 큰아이의 시선은 작은 아이에게 있지만 엄마를 뺏기고 싶지 않은 듯 엄마에게 기대어 엄마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다.

내 감정은 큰아이에게 이입된다. 엄마의 사랑을 빼앗긴 아이의 슬픔이 동생을 바라보는 부러운 눈빛으로 나타나있다. 메리는 섬세한 감각으로 사소한 장면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표현했다. 이즈음 메리는 결혼과 출산보다는 예술을 택한 후회와 자기연민을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 어느 길을 간들 후회 없는 인생이 있겠는가마는.

매리는 1911년 당뇨와 류머티즘, 그리고 신경통, 백내장 진단을 받는다. 그럼에도 작품을 쉬지 않다가 1914년 거의 시각장애인 판정까지 받고 붓을 놓는다. 그 와중에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해 작품 11개를 전시했고, 전쟁을 피해 온 벨기에 난민들을 돕는다. 외로움과 우울증,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메리는 1926년 당뇨 합병증으로 눈을 감는다.

[참고서적] 인상주의자 연인들(김현우, 마음산책), 메리 커셋 작품 성향의 변천 연구(김현화,석사학위 논문)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