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23)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사마르칸트의 상징인 레기스탄.

레기스탄은 오아시스 도시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이다. 타지크어(Tajik language)로 ‘모래(레기) 땅(스탄)’이란 뜻처럼, 레기스탄은 그 옛날 모래로 뒤덮인 사막이었다. 인류가 수만 년의 모래사막을 뚫고 길은 낸 지 수천 년. 동서교역의 요충지인 사마르칸트는 다른 어떤 도시들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저마다 가져온 상품들을 모래바닥에 깔아놓고 교역을 시작했다. 길거리 악사가 흥을 돋우고, 즉석 요리사들이 입맛을 당겼다. 유랑 변사와 마술사가 사람들을 더욱 불러 모았으며,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잡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세상을 배웠다.

사람들이 레기스탄에 오는 것은 일상생활이 됐다. 그곳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고 언제든 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레기스탄은 공공의 광장이 됐다. 그러자 레기스탄에 지배자의 권위가 나타났다. 알현식이 이뤄지고 사열과 열병을 받는 곳으로 바뀌었다. 또, 호기심과 불안에 떠는 대중들을 모아놓고 보란 듯이 형을 집행하는 공개 처형 장소로 변했다. 그들이 모래언덕을 피땀으로 일궈 만든 광장은 이제 두려움이 됐고, 그들은 동원된 광장에서 처절한 죽음을 보아야만 했다.

레기스탄 광장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티무르의 손자인 울루그벡 시대였다. 부친인 샤 루흐가 헤라트를 수도로 호라즘을 다스리고, 학문을 좋아하는 열다섯 살 울루그벡은 사마르칸트를 다스렸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다. 파미르 동쪽의 모골리스탄 원정을 감행해 이리강 상류까지 영토를 넓히기도 했는데, 그의 진가는 학문에서 더욱 빛났다. 조부인 티무르가 내륙아시아를 통일해 강대한 제국을 세웠다면, 울루그벡은 이를 토대로 문예부흥시대를 연 것이다.

사마르칸트의 흥망사를 전파한 비단길.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문양을 새겨놓은 시르도르 메드레세 입구.

울루그벡은 자신의 이름을 딴 메드레세(신학교)를 짓고 손수 신학, 수학, 철학, 천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당시 백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한 울루그벡 메드레세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가르친 왕립 대학이자, 중앙아시아 최초의 대학이었다.

사마르칸트의 중심가에 있는 레기스탄 광장은 건물 세 개가 ㄷ자 모양으로 배치돼있다. 울루그벡이 만든 왕립 대학은 정면에서 왼쪽에 있는 건물이다. 메드레세 입구에는 아랍어로 ‘학문을 연마하는 것이야말로 무슬림의 의무’라고 쓰여 있다. 학문과 교육을 중시했던 울루그벡은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천문대까지 세웠다. 그의 열정은 메드레세에 밤하늘의 별자리까지 표현해 놓을 정도였다.

울루그벡 메드레세 맞은편에 있는 시르 도르 메드레세는 ‘용감한 사자’라는 뜻이다. 이슬람은 원래 사람이나 동물을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메드레세의 입구에는 놀란 흰 사슴 두 마리를 쫓는 사자와 사람 얼굴 모양을 한 태양이 새겨져 있다.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문양이 이슬람 건물에 있다니 아이러니하다. 이는 17세기 우즈베키스탄 영주였던 바하자르가 자신의 권력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영주의 혹독한 종용에 어쩔 수 없이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는 어찌 됐을까. 종교적 양심의 가책을 못 이기고 자살하고 말았다.

레기스탄의 가운데에 있는 건물은 틸라 카리 메드레세다. ‘금색을 입힌’이란 의미다. 이곳은 학문뿐 아니라 집회 장소로도 사용됐다. 건물 내부에는 ‘군달 양식’이라고 해서 황금 나뭇잎을 눈부시게 표현했다. 여기에서 건물의 이름이 생겨났다. 양탄자 모양의 벽면과 황금빛으로 섬세하게 치장한 천장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별유천지비인간’의 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틸라카리 메드레세 내부의 황금나뭇잎 천장.

레기스탄이 지어진 지 수백 년이 흘렀다. 역사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건물 세 개는 아직도 하나하나가 화려하고 장중하다. 어느 시인이 “거대한 산 같은 내 몸 덩어리는 하늘의 뼈대를 무너뜨리고, 나의 육중한 무게는 땅의 척추를 흔들거리게 하는구나”라고 읊었듯이 오늘도 빼어난 예술성으로 사마르칸트를 빛나게 하고 있다.

티무르는 장대한 건축물로 제국에 걸맞은 위상을 갖추려했지만 이는 외관상 웅장함과 화려함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레기스탄으로 대변되는 울루그벡의 건축은 제국의 발전과 번영을 고심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국가의 운명은 어디서부터 쇠락의 길로 접어들까. 모름지기 그 출발은 문화적 전성기가 끝나는 시점일 것이다. 당나라 현종 때가 그렇고, 조선시대 영조와 정조 때가 그렇지 아니한가. 티무르 제국도 울루그벡 시대를 정점으로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울루그벡은 정복전쟁만을 중시한 신하들과 이에 편승한 아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참수됐다. 그러나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왕조의 울루그벡이 정복전쟁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제거된 것은 한갓 구실에 불과하다.

진리에 이르는 학문과 천지자연의 현상을 규정하는 천문학은 그때까지 공고한 위세를 누린 무사와 신학자들에게 분명 위기감을 주었을 것이다. 울루그벡은 영토 확장과 함께 길이 빛날 제국의 문화 건설 과정에서 수구파에게 어이없게 희생된 것이다.

울루그벡의 비참한 죽음은 결국 제국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머잖아 광대했던 티무르 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명한 지도자를 잃으면 국가도 무너진다. 지혜로운 지도자를 모시는 것이야말로 국가 번영에 중요한 것임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레기스탄 광장 앞의 연주단 조각상.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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