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생 전쟁둥이인 이입분(69)씨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부터 프랑스 산 ‘에비앙’ 생수까지 모두 맛본 세대다. 그가 온몸으로 통과한 현대생활사를 물건을 통해 되짚어보려 한다. 이입분씨는 내 엄마다. <기자말>

선선한 바람이 부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이젠 밤에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더워서 잠이 깨는 일이 없다. 그래도 한낮엔 선풍기와 30센티미터 이상 떨어지지 않으려 기를 쓰고 있으니, 무려 한 달 동안 이 더위를 겪어내는 중이다.

아마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나는 이번 여름을 더 힘들게 보냈을 것이다. 하나는 에어컨, 다른 하나는 아이스크림이다. 최근 한 달 사이 해치운 아이스크림 개수를 대략 따져보니, 아무리 못해도 지난 3년간 먹은 총량을 훌쩍 넘어서는 것 같다. 한 번에 열 몇 개씩 사다놓고 솔래솔래 빼먹는 중이다. 더위가 입맛도 바꿔놓았다.

지금보다 훨씬 작은 냉장고를 사용하던 어린 시절, 엄마는 프림과 설탕을 진하게 탄 물을 막대 꽂은 틀에 부어 얼린 아이스 바를 자주 만들었다. 가끔은 가게에서 파는 하드를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우리가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하나씩 꺼내주기도 했다. 엄마도 어린 시절에 아이스크림을 자주 먹었을까?

“그땐 아이스케키라고 했지. 아주 어릴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 뚜껑이 있는 네모난 상자를 목에 매달고 다니면서 팔았어”
“맛은 어땠어?”
“음… 좀 불그스름한 색이었는데 그냥 설탕 맛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안 나네”

미리 알아봤는데, 그 옛날 아이스케키는 팥가루가 들어가 붉은 색을 띠었다. 색깔을 기억할 정도라면 희미하게나마 맛이나 딱딱한 질감, 차가운 느낌 정도는 떠오르는 게 보통일 텐데, 집요한 질문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기억이 안 난다” “모르겠다”뿐이다. 엄마도 이상했는지 머리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솔직히 아이스케키를 먹었는지 모르겠어. 그냥 먹었다고 상상하는 건지도 몰라”

아이스케키는 1950~60년대를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기던 간식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엄마는 못 먹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아주 시골에서 살았거든. 동네에 집 대여섯 채가 있었고 한 시간 정도 걸어야 다음 집이 나오는 진짜 시골. 그런 곳에 아이스케키 장사가 올 수가 없지. 녹잖아. 가끔 네 할머니랑 읍내 시장에 가면 아이스케키 장사가 있더라고. 엿장수 마냥 자주 봤다면 할머니가 한 번쯤은 사주셨을지 모르지. 먹고 싶다는 생각도 못했어. 눈으로 보거나 맛을 알아야 먹고 싶단 생각도 하는 거지. 안 그래?”

# 아이스크림, 위생 엉망
 

출처 픽사베이.

1921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아이스크림 장사, 작일(어제) 탑골공원에서”란 설명을 단 흐릿한 사진 하나가 올라왔다. 작은 책상 크기의 탁자 위에 유리컵들이 올라와 있고, 주위에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다. 사진에 대한 별다른 설명은 없다.

1926년 6월 4일 <동아일보>에 아이스크림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조선에도 여름이면 거리거리에 일 전에 한 그릇짜리 아이스크림 파는 사람이 많습니다. (중략) 어린 아이나 어른들이나 달콤하고도 시원하고 싼 맛에 자꾸들 사먹습니다. (중략) 길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이 가장 위태하고 무서운 것은 아이스크림을 담아 파는 그 유리그릇입니다. 조그마한 그릇에 냉수 한 아름 떠놓고 누가 먹든 그릇이 한 번 그 물에 절레절레 흔들어 대다가는 아이스크림을 담아줍니다’

이 기사를 보면,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의 옷이 깨끗하지 않고 손도 더러웠다고 한다. 또 길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은 조선호텔에서 만든 것과 달리 몸에 좋지 않은 재료로 만든 데다 제대로 얼리지 않아 위생상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수돗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환경에 화장실에 제대로 된 휴지도 없었다. 게다가 여름이니 각종 균들에겐 물 만난 시기다. 하지만 누군가 전염병이나 설사병에 걸려 사망했고 그날 그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밝혀낼 의학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에 의한 중독 기사는 1950년대에야 등장한다.

‘성북구 돈암동 268번지에 거주하는 염평자(36)씨 외 가족 3명은 지난 16일 하오(낮) 3시 경 종로3가 소재 도위빙과점에서 아이스크림 슈크림 한 개씩을 사먹은 것이 중독되어 약 30분 후 실신상태에 빠졌다고 한다’(1955.8.19. 동아일보)

# 초등학생 노동자 아이스크림 행상

비위생적인 아이스크림을 판매한다며 지탄을 받은 장사꾼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집안의 노동자였다. 1920~30년대 아이스크림 판매상의 인적사항을 담은 기사는 찾을 수 없었지만 1950~60년대 몇몇 기사를 보면 어떤 이들이 아이스크림이나 아이스케키 장사에 뛰어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둘째 아들 경만(19) 군은 놀고 있고 그 아래 경덕(15) 군은 아이스케키 장수…’ (1961.9.2. 경향신문)

‘비가 와 지게질을 못한 아버지가 밀린 외상 물짐 값을 받아 보리를 사오던 길, 집에선 참변이 일어났다. 축대가 무너져 집안에서 그대로 압사한 일가족은 이틀 내내 굶은 상태였고 평소에도 잘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하게 마른 상태였다. 그 중 15세 경덕 군이 아이스케키를 팔아 생계에 보태려 했다’는 내용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또, 1967년 8월 3일 <동아일보>에는 ‘거리에서 아이스케키를 팔던 전오곤 군이 16만원 짜리 보증수표를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전오곤군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 아이스크림 전성시대

출처 픽사베이.

작은 규모의 업체끼리 경쟁하던 아이스크림 시장에 대기업이 손을 뻗기 시작했다.

‘이 하드 아이스크림은 소규모의 수공업을 탈피한 대규모 제조의 기업화를 꾀해 삼강유지화학이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완전한 위생시설을 갖춘 영양식품으로써 등장했다’ (1962.8.20. 경향신문)

큰 기업에서 만든 아이스크림이 관심을 많이 끌었는지 이를 흉내 낸 제품도 판을 쳤다. 이에 삼강은 무엇이 진짜인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신문광고를 큼지막하게 실었다.

[행상 박스에 ‘삼강 하-드 아이스크림’이라 쓰여져 있고 역시 ‘삼강 하-드 아이스크림’이라고 쓰여진 까운을 입고 삼강의 마크가 찍힌 모자를 쓴 아이들이 팔고 있습니다] (1963.7.13. 동아일보)

삼강의 호소를 되받은 건 삼강의 행태를 비판한 <경향신문> 사설이었다. ‘삼강이 면세 물품인 연유제조기라며 들여온 기계가 사실 아이스크림 제조기였고, 이를 들여오기 위해 중소기업 진흥을 위해 마련한 DLF 차관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또 있었다. 삼강의 역사는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의 형 이병각이 1958년 일동산업을 설립하고 1959년 12월 삼강유지공업으로 이름을 바꾼다.

‘삼강유지화학은 이병철 씨를 중심으로 하는 삼성재벌 산하의 회사라고 하며 유지화학회사가 어찌하여 아이스크림 따위를 만들어 팔고 있는지 식자로 하여금 의아한 인상을 느끼게 하여 왔던 것이다’(1963.7.20. 경향신문 사설)

중소기업을 위해 들여온 차관을 대기업에서 이용한 것도 모자라, 우리 경제에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차관을 이용해 수입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기고 아이스크림 제조기를 몰래 수입했으니 비난받아 마땅했다. 사설은 여기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올 여름의 특징은 삼강 하드 아이스크림 바람에 군소영세업자들의 빙과업이 일대 공황을 일으켰다는 데 있을 것이다. 삼강유지화학회사가 DLF 차관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내는 결과는 그것이 군소 빙과제조기업에 심대한 타격을 주며 아이스크림 제조업의 독점화 현상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후 삼강유지는 1966년 국보급 문화재 장물취득사건으로 기소돼 경영권을 계광산업 사주에게 넘겨 ‘삼강산업’이 됐고, 1977년 경영권 싸움으로 흑자 부도가 난 뒤 롯데그룹이 인수했다. 1978년 롯데삼강으로 회사 이름을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는 빙과류의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2년은 연초부터 빙과류 경쟁이 예고된 해였다. 해태제과(시장점유율 약 30%)와 삼강(20%), 금성유업(15%) 등 3개 대기업과 백설빙과 등 60여개 중소기업(35%)이 신제품 개발과 최신 설비 등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였다.

부라보콘(1970년)을 선두로 업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해태제과는 주식 상장으로 자금을 모아 1974년 새 공장을 준공했다. 1975년엔 업체들이 기습적으로 동시에 빙과류 값을 40~50% 인상하고 저마다 새 공장 세우기에 몰두했다. 정부에서 가격 인하를 지시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신문에 큼지막한 광고를 실었고 TV에선 유명 배우가 광고모델로 나섰다. 아이스크림 판매 경쟁에 원유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다. 빙그레 투게더(1973년), 삼강 아맛나(1974년), 해태 바밤바와 누가바(1976년)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나온 제품이다.

빙과류 업체들의 성장은 1980년대에도 이어졌다. 해태, 롯데제과, 빙그레, 롯데삼강도 상위 순위를 그대로 이어갔다. 종류는 더 다양해져 해태 쌍쌍바(1979년), 롯데삼강 돼지바(1983년)와 빵빠레(1984년), 롯데제과 죠스바(1983년)와 월드콘(1986년), 빙그레 메로나(1992)가 큰 인기를 끌었다.

# 콩나물보다 비싼 쭈쭈바

엄마에게 빙과류의 첫 기억은 쭈쭈바였다.

“첫 애 낳고 맞은 여름이었어. 니 이모랑 길을 걷고 있는데 이모가 너무 더웠는지 가게에서 쭈쭈바를 사먹자고 하더라고. 당시에 엄청 인기였거든. 근데 난 그런 거 사먹을 줄을 몰라서 가만히 있었지. 이모가 100원을 주면서 사오라고 하기에 가게에 들어갔어. 쭈쭈바 두 개를 집고 돈을 냈는데 거스름돈을 안 주는 거야. 주인이 하는 말이, 한 개에 50원이라더라고. 콩나물 한 봉지도 더 되는 가격이라니, 비싸서 깜짝 놀랐지. 내 돈 주고 사먹은 건 너희가 좀 커서부터였지”

엄마가 언니를 낳은 것이 1975년 12월이고 쭈쭈바는 1976년 롯데삼강에서 나왔으니 엄마의 기억과 딱 들어맞는다. 쭈쭈바에 대한 기억마저도 맛보다는 ‘비쌌다’는 감정이 더 강렬하니 그 궁핍한 살림을 꾸려오느라 얼마나 고되었을지, 안쓰럽고 안타깝다.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라는 것도 그것을 누릴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갖춰진 이들에게만 해당한다. 단 한 번도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뭐 한 가지라도 맘껏 누리고 살지 못했던 우리 엄마가 살아온 흔적은, 기억은, 역사는 어디에 남아 있는 걸까.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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