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현관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남편은 얼마 전 일을 그만뒀다. 몇 달 쉬면서 수료한 지 몇 년 지난 대학원 학위 논문을 쓸 작정이라 했다. 늘 바빴던 남편. 일을 그만두면 밥도 같이 먹고 집안일도 나눠 하고 대화도 많이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남편은 배드민턴 클럽 두 군데나 가입해 틈만 나면 밖으로 돌았다.

집안 돌아가는 일은 모조리 내게 맡기기로 작정한 건지, 아예 관심이 없다. “이 집에 나만 사니? 어지른 건 좀 치우라고!” 나도 폭발하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 남편은 딱 청소기만 돌린다. 이런저런 일을 일부러 시켜보지만 영 내 맘에 들지 않는다. 나는 지적하고, 남편은 짜증내고.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아졌다.

오늘도 사소한 일로 옥신각신하던 중 남편이 휑하고 나가버렸다. 혼자 씩씩대며 설거지를 했다. 마음이 가라앉으니 뭔가 허탈하다. 어려선 부모님이 이러시더니….

ⓒ심혜진.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주말이었다. 다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바나나로 요리를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아빠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예전에 대만에서 바나나튀김을 먹었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는 거다. “겉은 바삭한데 속은 얼마나 달고 부드러운지 아니? 입안에 넣으면 곧바로 사라진다니까” 허풍쟁이 아빠의 현란한 말솜씨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침 식탁에 바나나가 있었다. 아빠는 바로 바나나튀김을 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때였다. 엄마가 한숨을 쉬며 아빠를 가로막았다. “가스레인지고 어디고 다 기름투성이 해 놓으려고? 안 돼. 하지 마” 그런다고 포기할 아빠가 아니다. “알아서 할 테니 잠자코 먹기나 해”

아빠는 싱크대 여기저기를 여닫으며 “기름이 어디 있더라? 밀가루는…” 하고 혼잣말을 했다. 부엌에서 음식해본 일이 없으니 무엇이 어디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겨우 겨우 재료들을 찾았다. 아빠는 바나나를 어슷하고 길쭉하게 썰었다. 물과 밀가루를 섞은 반죽을 바나나에 묻혔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바나나를 튀겼다. 엄마의 예상은 적중했다. 늘 광이 나던 싱크대와 가스레인지는 기름과 밀가루로 엉망이 됐다.

바나나튀김인지 전인지, 하여튼 접시 위에 노란 것이 올라왔다. 익은 바나나는 흐물흐물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바나나튀김에서 생선 맛, 그러니까 비린내가 났다. 엄마가 아빠에게 물었다. “어느 프라이팬에 튀겼어? 밀가루는 뭐 썼고?” 엄마는 생선 튀기는 프라이팬과 감자나 계란을 요리하는 프라이팬을 따로 구분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선 튀길 땐 겉에 꼭 부침가루를 묻혔는데, 넓적한 통에 담아 냉장고에 두고 사용하고 있었다. 아빠가 집어든 것이 바로 그 생선용 부침가루, 생선용 프라이팬이었다.

오랜만에 애쓴 결과가 형편없게 됐다. 아빠 표정이 머쓱해졌다. “어, 이게 아닌데. 진짜 바나나튀김은 정말 맛있거든…” “바나나튀김은 무슨…” 영 믿을 수 없다는 듯 못마땅한 얼굴로 아빠를 타박하는 엄마가 나는 좀 얄미웠다. 좀 가르쳐주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난 비린내 풀풀 나는 바나나튀김을 일부러 보란 듯 싹 먹었다.

엄마와 아빠에겐 각자의 입장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주로 엄마를, 가끔은 아빠를 응원했다. 물론 그 판단은 아이인 내 입장에서 내린 것이다. 남편과의 신경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전적으로 내 편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남편 뒷모습에서 바나나튀김을 앞에 두고 머쓱해하던 아빠가 떠오른다. 뭐지, 이러면 안 되는데. 내 편과 남편 편을 번갈아 가며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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