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도시 변두리마을 낡은 주택. 한량에 가까운 일용노동자 오사무(릴리 프랭키), 세탁소 비정규직 노동자 노부요(안도 사쿠라), 낡은 집의 주인이자 연금으로 살아가는 하츠에(키키 키린), 유흥업소에서 용돈벌이를 하는 사야카(마츠오카 마유), 학교에도 가지 않고 오사무에게 배운 좀도둑질로 생필품을 구하는 쇼타(죠 카이리), 이렇게 다섯이 함께 산다. 여기에 학대와 방치로 이들이 ‘주워온’ 소녀 유리(사사키 미유)까지 합류해 여섯이 됐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할머니 하츠에, 아버지 오사무, 어머니 노부요, 이모 사야카, 아들 쇼타, 막내딸 유리, 이렇게 3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 같다. 그러나 법적으로도 혈연으로도 전혀 연결되지 않은 ‘남’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어느 가족’은 ‘정상 가족’ 범주 바깥의 가족에 천착해온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이상한, 그래서 특별한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국가에 등록된 성명과 상관없이 집 주인인 하츠에 시부타의 성을 따서 모두 시부타라는 성을 가지게 된 시부타가(家) 여섯 명은 여느 가족 못지않은 따뜻한 유대관계를 보여준다. 얼핏 보면 ‘가난하지만 따뜻한 정이 넘치는 가족’이라는 빤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따뜻한 유머 사이 언뜻언뜻 비치는 시부타가 구성원들의 속사정은 맘 편히 웃으며 이 영화를 볼 수 없게 한다. 이들은 모두 복지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버려진’ 존재들이다. 남편에게 버림 받은 후 연금으로 연명하는 하츠에는 가난한 독거노인일 뿐이고, 오사무는 일하다 다쳐도 일용직이란 이유로 산재 처리조차 받지 못한다.

노부요는 ‘워크셰어(일자리 나누기)’라는 듣기 좋은 말로 더욱 가난해지고 끝내 정리해고 대상이 된다. 사야카는 유사성매매로 생계를 이어간다. 쇼타 역시 언젠가 부모로부터 버려져 시부타가의 일원이 됐다. 뒤늦게 합류한 유리는 또 어떤가. 친부모로부터 ‘낳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고, 몸에 난 상처로 미루어 짐작컨대 신체적 학대도 당했다.

사회로부터든 가족으로부터든 버려진 이들이 모여 가족이 됐다. 이들은 하늘이 내려준 인연, 즉 혈연이 아니라 각자의 ‘필요’ 때문에 서로를 ‘선택’했다. 가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처럼 보이는 ‘필요’와 ‘선택’으로 맺어진 시부타가는 “혈연으로 묶이지 않았기에 오히려 기대하지 않을 수 있어서” 혈연가족보다 더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물론 시부타가의 따뜻한 유대감은 위태롭다. 불안정한 저임금 육체노동, 도둑질, 유사성매매, 쥐꼬리만 한 연금으로 유지되는 버려진 이들의 생존은 고달프고 불안하다. 법적으로도 혈연으로도 묶이지 않은 이들의 관계는 누구에게도 떳떳이 드러낼 수 없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사기행각일 뿐이다.

결국 영화 후반부, 국가기관이 이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자마자 시부타가는 산산이 쪼개진다. 시부타가 누구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이들의 가족관계는 결코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유괴와 유기, 학대의 오명을 쓴다. 그러나 묻게 된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 노인과 아이에 대한 방치와 학대를 일삼는 국가와 가족이라는 시스템과 합법적이지는 않지만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시부타 가족. 무엇이 더 큰 문제일까.

유리를 유괴한 것으로 의심하는 수사관에게 “우리는 주웠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노부요의 절규 앞에서 우리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혈연으로 연결돼야 가족이라는 기존 가치체계로는 우리의 가난함을, 불안함을, 외로움을 넘어설 수 있는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걸 이 좀도둑가족(万引き家族)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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