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진보당 216만표 2017년 정의당 201만표 그리고 노회찬

올해도 문재인 대통령 조화 죽산 영정 앞에 놓여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8주기 추모제 때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조화를 보낸 데 이어 올해도 조화를 보냈다.

지난 7월 31일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 서거 59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1959년 7월 31일 11시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에, 죽산 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와 유족은 매년 11시에 서울 망우리 묘역에서 추모제를 지낸다.

조봉암 선생은 1899년 인천 강화도에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일제강점기 때 조선공산당을 창당해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 일로 1933년 상하이에서 체포돼 신의주에서 7년을 복역했다.

해방 후 죽산은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1948년 인천을구(현재 부평ㆍ계양ㆍ서구 일대)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제헌 의원(1948년)과 2대 의원(1950년)에 당선돼 초대 농림부 장관과 2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죽산은 1948년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지주에겐 현금 대신 정부 채권을 줬다. 채권은 시중 가격의 30%에 불과했다. 또 정부가 양곡을 매입하고 배급하는 방안을 마련했고, 농촌개혁을 이끌 농민조직 결성을 주도했다.

그 뒤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며 1952년 2대 대통령선거와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죽산은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려했지만 이승만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후보 등록조차 못했다.

후보 등록에 실패하자 보수 세력에 맞설 혁신 정당, 진보당 창당의 길로 들어섰다.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주요 노선으로 내걸고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30% 넘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가 주창한 노선은 오늘날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와 다름없다.

죽산은 그렇게 독재자 이승만의 최대 정치적 라이벌로 등장했다. 그러 공교롭게도 그게 1959년 사법살인의 발단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 정부는 죽산에게 '북한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1959년 사형을 집행했다. 죽산이 죽고 한참 뒤 지난 2011년 대법이 재심을 수용해 무죄를 선고하고,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그리고 지난 58주기가 되던 해 대한민국 대통령의 조화가 처음 죽산 영정 앞에 놓였다. 그리고 올해도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가 놓였다.

한국당 김병준 비대위원장과 윤상현 의원도 조화를 보냈고, 민주당에선 박남춘 인천시장과 홍영표 원내대표, 송영길 의원, 박찬대 의원이 조화를 보냈다. 바른미래당에선 김동철 비대위원장과 이학재 의원이, 정의당에선 김응호 인천시당위원장이 조화를 보냈다.

그리고 추모식에는 바른미래당 손학규 고문, 민주당 박남춘 시장과 송영길 의원, 박찬대 의원이 참석했고, 민선 6기 조동암 정무경제부시장,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장 등이 참석했다. 그리고 '이부망천'으로 곤욕을 치른 정태옥 의원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정 의원은 인천시 기획실장 때부터 죽산을 기리는 데, 개인적으로 참여했고,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죽산에 대한 훈장추서에 힘을 보태고 있다. 내년 서거 60주기를 앞두고 ‘조봉암’이란 이름이 좌우 이념을 넘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셈이다.

1956년 조봉암 216만표, 2017년 심상정 201만표

죽산 조봉암 서거 59주기 추모제가 31일 망우리묘역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민주당 박남춘 시장, 송영길 국회의원, 박찬대 국회의원, 한국당 정태옥 국회의원, 바른미래당 손학규 상임고문 등이 참석했다.

내년은 죽산이 태어난 지 120년, 서거한 지 60년 되는 해다. 죽산 명예회복에 앞장선 기념사업회와 유족은, 새얼문화재단은 내년 독립유공자 훈장 추서를 위해 노력하고 있고, 인천에 죽산 선생 동상을 건립할 계획이다.

죽산과 함께했던 이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됐다. 곽정근 죽산기념사업회장은 “1956년 대선 때 인천의 거리에서 ‘조봉암’ ‘조봉암’을 외치고 다녔던 20대 청춘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저도 80대 후반에 들어서고 있다.”며 “저의 선배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다. 그래서 죽산 선생님의 발자취로 희미해지지 않나 하는 걱정도 간혹 하게된다”고 인사말을 했다.

곽 회장은 “그런데 많은 시민들이 선생님 말씀과 연보를 적어 놓은 비석을 읽어보고, 또 올라와 참배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 몇몇 동지들이 쓸쓸한 장례를 치렀다. 선생님의 시신을 여기 모실 때만 해도 그저 깊은 산골이었고, 길이 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내년에 반드시 선생님께 건국 훈장이 추서되고 인천에서 가장 유서 깊은 거리에 동상이 건립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인천시장으로선 4년만에 추모제에 참석한 박남춘 인천시장은 죽산의 어록인 ‘우리가 독립을 할 때 돈이 준비가 되어서 한 것이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한가?’를 인용해 “선생의 이 말씀은 저를 깨우치는 죽비소리와 같다. 죽산의 가르침을 따르는 시장이 되겠다”고 했다.

박 시장은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부의장으로서 제일 늦게 피신했고, 이 과정에서 아내는 납북되는 불행을 겪었다. 또 농림부장관으로 많은 공격을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이끌었다. 지도자로서 무한책임을 따라 배우겠다”고 덧붙였다.

성공회대 오유석 교수는 지난 23일 생을 마감한 고 노회찬 전 의원을 추모하며, 그와 그가 속한 정의당을 죽산과 진보당에 견줘 ‘진보정당의 길’을 설파했다.

오 교수는 “2017년 대선에서 정의당은 1956년 죽산이 받은 216만표를 넘어서진 못했지만 드디어 200만표를 넘어섰다. 그리고 조봉암과 진보당의 노선과 현실적 고민은 2016년 촛불혁명 이후 한국 민주주의 재구성을 말할 때 여전히 큰 가치와 실천으로 다가온다. 특히, 죽산이 주창한 평화노선은 2018년 판문점선언을 통해 분명하게 다가온다.”며 “변화의 출발은 냉전과 분단의 한계에 과감한 도전한 죽산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자리매김과 함께, 정당 정치의 지형을 진보로 바꾸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조봉암과 노회찬 두 사람의 유언을 마지막으로 읽으며, 두 사람을 추모하고 진보정당을 응원했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을 헛되이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뿐이다"-조봉암 유언-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노회찬 유언-

죽산 명예회복, ‘독립운동과 건국’ 훈장추서만 남아

죽산 조봉암 영정. 올해도 죽산 영정 앞에는 숱한 조화가 놓였다. 하지만 그의 독립운동 유공과 건국 기여에 대한 훈장 추서는 올해도 무산됐다.

죽산 2011년 대법원 재심 때 무죄 판결로 복권됐다. 1956년 서대무형무소에서 이슬로 사라진 죽산에게 이승만 정부가 씌운 대표적인 죄명이 간첩죄다. 대법원은 재심 판결문에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죽산에 대해 ‘일제강점기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인물로 평가를 정리했다. 대법원이 죽산의 독립운동 유공 건국 기여를 인정한 것이다.

죽산의 공산당 활동 관련해서도 국가기록원은 일제강점기 때 공산주의운동의 성격을 ‘독립운동 일환으로 전개된 공산주의운동’이라고 평가했다.

대법에서 무죄를 판결 받았지만, 기념사업회과 유족이 바라는 죽산의 명예회복 완결은 훈장 추서다. 하지만 죽산에 대한 훈장 추서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단신 기사를 문제 삼았다. 1941년 12월 23일자에 '인천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사는 조봉암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다.

그러나 당시 죽산의 주소가 부평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성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증언에도 국가보훈처는 올해에도 유가족에게 서훈에 필요한 "보완 자료를 제출하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죽산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당시 죽산 선생의 위상을 고려했을 때 죽산이 그만한 돈을 냈으면 아마도 일제가 이를 이용하기 위해 대서특필하는 게 맞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단신 기사로 처리했다. 기사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면서도 “1945년 8월 15일까지 수개월 동안 구금됐던 죽산의 당시 기록을 찾을 수 없어서 답답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지난 2007년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위원회는 “조봉암이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있으므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념사업회와 새얼문화재단은 내년 훈장 추서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