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싫은 사람 등

햇볕에 무슨 약이라도 타놓은 걸까. 만사가 귀찮고 꼼짝하기도 싫다. 가뜩이나 집안에 머물길 좋아하는데 날씨까지 무더우니 과자 한 봉지라도 사러 나가려면 크게 마음을 먹어야한다. 7월 중순에 미리 휴가 다녀오길 잘했다 싶다가도 한편으론 남은 여름을 쉼표 없이 보낼 생각을 하면 암울하기도 하다. 본격 불볕더위가 시작하는 8월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자고 일어나면 낮 최고ㆍ최저 기온 기록이 경신됐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 여름을 무사히 잘 보내려면 마음의 각오와 함께 몇 가지 현실적 준비가 필요할 듯하다.

우선 에어컨 청소를 했다. 우리 집엔 몇 해 전 지인이 준 벽걸이 에어컨이 하나 있다. 작년까진 이 에어컨을 설치하지도 않았는데 올해 더위는 급이 다르다. 그래도 전기세 걱정에 에어컨 옆면에 적힌 소비전력에 사용시간과 전기요금을 곱해 계산해봤다.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면, 한 달 내내 8시간 이상 틀어도 3만원에서 5만원 정도만 더 보태면 꽤 시원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전문 업체를 불러 내부 청소를 하고 지난 주말 처음 틀어보았다. 그동안 에어컨 없이 어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쾌적했다.

이제 시원한 집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문제만 남았다. 보고 싶은 영화 목록을 쭉 적어봤다. 하루에 두세 편씩 보면 일주일이 휙 지나갈 것 같다. 이번엔 책꽂이로 눈을 돌렸다. 사놓고 채 읽지 않은 책들이 툭툭 눈에 걸린다. 여름휴가철 서점가는 성수기를 맞는다는데, 나도 책 서너 권쯤 마련해두는 것이 휴가 준비 중 하나였는데, 이번 여름엔 글자가 머리에 쏙쏙 들어갈 것 같지 않다. 아마 소설보다는 과학이나 인문학 책을 좋아하는 성향 탓일 수도 있다.

그러다 내 눈길이 멈춘 곳이 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등한시했던 책들이다. 사람에 지쳤을 때 기대어 쉬던 휴식 같은 책, 직업적 무능함에 좌절했을 때 위로가 되어준 책, 엉뚱한 상상에 피식 웃음 짓게 하던 책들이 모여 있는 곳. 바로 만화책들이 꽂힌 책장이다. 나는 판타지보다는 현실의 씁쓸함과 소소함, 따뜻함이 그대로 배어있는 만화책을 좋아한다. 이런 책에서 위안과 힘을 얻는다.

사람에 지치나 더위에 지치나, 지치면 쉬어야하는 건 똑같다. 현실에 딱 발을 붙인 채 잠시 공감하며 쉬어갈 수 있는 만화책을 소개한다. 내가 아주 아끼는 ‘최애템’으로만 골랐다.

# 아무래도 싫은 사람
|마스다 미리 지음|이봄 펴냄

마스다 미리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에세이스트다. 우리나라에도 책이 여러 권 번역돼있을 만큼 팬 층이 두텁다. 마스다 미리의 책은 저마다 매력이 있어 많은 책들 가운데 어느 책을 소개해야할지 머리가 좀 아팠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은 내가 이 작가의 세계에 발을 들어놓게 된 작품이다. 이 책의 주인공 수짱은 서른여섯 살 독신 여성으로 직업은 카페 점장이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과 함께 일하며 겪는 괴로움이 짧은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마스다 미리는 인물을 단순하게 그려 그림이 담백하고 내용도 뭐 하나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일상성 때문에 독자들은 수짱의 고민을 바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유독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에겐 그리 나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지만 유독 내 신경을 긁는다. 가뜩이나 스트레스가 많은 직장에서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힘이 몇 배는 더 들 수밖에 없다. 수짱은 자신이 누군가를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무엇 때문에 불편하고 화가 났는지 늘 생각하지만 이를 겉으로 티내진 않는다. 가볍게 넘기려하지도 않고 상대를 미워하는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카레를 해먹고 피자를 시키고 사촌동생과 저녁을 먹는 일상을 성실히 해내며 고민을 이어간다. 우리 모습 그대로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나는 사회성이 부족한 편이다. 정말 싫은 사람을 만나면 나는 무조건 피하고 본다. 수짱은 과연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할지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겼다. 마지막 장면. 수짱은 어떤 결단을 내린 뒤 오랜만에 꽃향기를 맡고 기분이 좋아진다. 아, 이 느낌, 나도 알 것 같다. 문제에 휩싸여 있을 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것들이 고민이 해결되고 나면 그제야 보인다. 마스다 미리는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중요한 고민을 떠안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하고 담백하게 보여준다. 내가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은 ‘지금 이대로 괜찮을 걸까?’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수짱의 연애’와 함께 ‘수짱 시리즈’다. 연애며, 결혼이며, 직장생활, 뭐 하나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 속에서 작은 행복을 꿈꾸며 사는 이들이라면 수짱이 좋은 친구, 선배, 동생이 돼줄 것이다.

조금 더 진한 힐링을 원한다면 ‘주말엔 숲으로’를 추천한다. 갑자기 시골 생활을 선택한 하야카와와 도시에서 이래저래 부대끼며 사는 두 친구의 이야기다. 두 친구는 가끔 하야카와네 집에 놀러간다. 일상으로 돌아와 어떤 순간을 마주했을 때, 하야카와와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부모님과 함께 살며 벌어지는 일들을 담백하게 그린 ‘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씨 댁의 이런 하루’, 엄마와 아빠의 일상을 담은 ‘엄마라는 여자’와 ‘아빠라는 남자’도 잔잔한 재미와 감동을 준다.


# 혼자를 기르는 법 1, 2
|김정연 지음|창비 펴냄

 

서울의 좁은 원룸에 혼자 사는 이십대 후반 사회 초년생 여성, 이름은 이시다. ‘혼자를 기르는 법’의 주인공이다. 시다가 살아가는 환경과 조건, 처우가 안 봐도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시다는 친구가 맡긴 햄스터를 키우다 작은 동물 사육에 입문해 동네 주민 오해수와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다. 이들 사이에서 말풍선으로 오가는 대화도 재미있지만 공손한 듯 뼈가 실린 시다의 독백이 가장 돋보인다.

독백은 대화할 사람 없이 혼자 사는 시다의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속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기에 적절한 설정이다. 여섯 컷으로 하나의 완결된 에피소드를 그려낸 작가의 구성력과 연출력이 놀랍다. 이 안에 주제와 위트, 유머와 씁쓸한 뒷맛까지 모두 담은 것도 모자라 독자의 공감까지 이끌어내는 것은 더욱 놀랍다.

나는 이 책이 지금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맘에 들었다. 물론 만화라는 형식에 맞게 기발한 상상과 유머가 곳곳에 드러나지만, 20대 청춘의 외로움과 사회의 높은 벽 앞에서 느끼는 좌절감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20대들에겐 웃음과 공감을, 다른 세대에겐 젊은 ‘홀로족’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순진하면서도 똘끼가 있고 순하디 순하지만 가끔 욕도 뱉을 줄 아는, 자신보다 약한 작은 생명의 처지를 이해하는 마음 따뜻한 친구 한 명 얻은 느낌도 든다. 2016년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작이다.

 

# 리틀 포레스트 1, 2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세미콜론 펴냄

올해 초 개봉한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원작이다. 작가인 이가라시 다이스케는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자급자족하며 지낸 실제 경험을 ‘리틀 포레스트’에 담았다. 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해먹는 과정이 상세히 나온다. 식재료에 대한 설명과 꽃과 나무의 그림 묘사도 풍부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손으로 만들어야하는 시골 생활을 간접 체험하는 느낌이다.

생소한 식재료와 낫토떡, 뱀밥, 생강떡, 무 타르트 등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은 그 맛을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다. 음식 설명에 비해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약한 편이다. 캐릭터와 스토리가 분명한 영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영화와 가장 큰 차이는 결말이다. 엄마와의 새로운 관계를 암시한 영화와 달리 만화에서 엄마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단순한 음식 만화를 넘어 저자의 삶에 대한 철학이 돋보이는 책이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