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울릉도 앞바다에서 발견됐다는 드미트리 돈스코이 호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돈스코이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러시아 군함이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자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돈스코이 호가 조선 연안에 등장한 건 그보다 10여 년을 앞선 1890년대 중반쯤이다. 다른 러시아 군함들과 함께 진해와 마산 등지의 연안에 나타나 수심을 측량하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작업을 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해인 1897년에는 인천항에 정박해 수병들을 서울에 파견하기도 했다. 무장한 수병들은 대포를 끌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이어진 육로를 따라 입경했다. 수레를 몰고 서울로 가는 길은 대원군로라고 불렀던 원통이고개의 신작로였다. 이 러시아 수병들은 배가 침몰된 후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고 전해진다.

돈스코이 호가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끈 이유는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는 금괴 때문이다. 그래서 군함보다는 보물선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근대사에는 유독 사라진 보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동굴에 감췄거나, 바다에 매장됐거나,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하지만 제대로 실체를 발견한 적은 아직 없었다.

캠프마켓에도 보물과 관련한 이야기가 있었다. 일본군이 조병창을 운영하면서 보관했던 금괴를 광복이 되자 땅 속에 묻고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내막은 이렇다. 일제강점기 후반에 중국에서 보낸 공문 한 통이 부평에 있던 조병창으로 전달됐다. 일본군이 중국에서 보유하고 있던 금괴를 이곳으로 옮겨 놓기 위해 보낸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것이 유일한 단서가 됐다.

1980년대 초에 이 문서를 확인한 사람들이 조병창 땅 밑을 조사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정부도 관심을 보였다. 당시 이 일을 직접 기획하고 참여했다는 한 인사는, 확신은 있었지만 문서가 한 장이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금괴를 보낸다는 발신 문서는 있는데 금괴를 받았다는 수신 문서는 없었다는 것이다. 어찌 됐건, 계획대로 발굴 작업이 시작돼 조병창 외곽의 땅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꽤 깊고 넓게 파들어 가긴 했지만 금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미군이 조병창을 접수해 운영하던 시절에는 땅속에 묻힌 동전만 수거하던 병사도 있었다. 그만큼 조병창에 들어온 물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건들은 당연히 군수 물자를 만들기 위해 수탈해온 재료들이었다. 인천 주변에는 금광도 여러 곳 있었다. 문학산은 물론이고, 인근 섬 지역까지 금이나 광물을 캐기 위한 광산들이 운영됐다. 조선 사람들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곳들은 지금은 대개 잊힌 장소가 됐다.

잊을 만하면 숨은 보물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모든 관심은 발견될 보물의 가치에 집중된다. 흔히 보물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엄밀히 말해 수탈한 결과물이거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사용될 재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보물이라고만 말하는 건 어폐가 있다. 값으로 매길 수 있는 것만이 보물은 아니다. 우리가 겪은 시대의 보물은 과연 무엇일까.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보물이 아닌, 역사 속 진짜 보물을 찾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역사와 일상의 가치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시도가 필요하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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