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21) 아무르티무르의 고향 샤흐리삽스

샤흐리삽스 악크사라이궁전 기둥.

14세기 후반.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지배하던 몽골제국도 왕권계승 문제로 분열하기 시작한다. 둘째 아들 차카타이가 다스리던 중앙아시아의 차카타이칸국도 동서로 나뉘어 권력다툼이 심화된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티무르가 등장한다. 그는 난세를 평정하고 1369년 티무르제국을 건설한다. 현재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사방을 복속시켜 1405년에는 인도 델리에서 북으로 타쉬켄트를 지나 아랄해 북단, 서쪽으로는 흑해와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는 칭기즈칸 이후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것이었다.

티무르의 고향 샤흐리삽스

티무르의 고향 샤흐리삽스로 간다. ‘초록빛 마을’이라는 샤흐리삽스는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70여km 떨어진 곳이다. 이곳을 가려면 제라프샨 산맥을 넘어야한다.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온통 바위투성이다. 구불구불 뱀처럼 늘어진 산길을 한 시간 넘게 달려 샤흐리삽스에 도착했다.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지만, 그의 고향은 한적하다. 그는 호라즘 왕국을 정벌하고 생포한 건축가와 장인들을 이곳과 사마르칸트로 보내 거대한 궁전을 짓게 했다. 그때 지은 아크사라이궁전은 남아 있지 않고 정문 기둥 두 개만 덩그러니 서 있다. 그 높이가 지금도 34m이니 당시 궁전은 50m 이상이었으리라.

정문 기둥 뒤로는 티무르의 동상이 우뚝하다. 주변은 잔디가 푸르른 공원이 됐다. 이곳의 원래 지명은 ‘케시’였다. 티무르가 권력을 잡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무너진 궁전 주위엔 잔디가 푸르다. 주위에는 모스크와 바자르, 목욕탕 등 당시 유적들이 남아 있다.

티무르의 등장과 대제국 건설은 유럽을 긴장시켰다. 유럽에서 티무르를 ‘티무르 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으로 전쟁에서 다리를 다친 티무르를 경멸조로 부른 말이다. 그가 이렇게 불린 것은 그의 잔악스런 정벌 때문이었다.

그는 점령지마다 대량학살을 감행해 수만 개의 수급으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정복하는 도시마다 폐허로 만들었고, 각종 전리품은 수도인 사마르칸트로 옮겼다. 전리품에는 코끼리와 유능한 장인들도 포함됐다. 이들은 티무르가 심혈을 기울인 사마르칸트의 세계적 도시 건설에 동원됐다. 칭기즈칸이 파괴하고 티무르가 건설했다는 아름다운 도시 사마르칸트의 탄생 이면에는 킬링필드가 된 수많은 도시의 파괴와 약탈, 그리고 포로로 끌려온 장인들의 한과 고통이 배어있는 것이다.

제왕도 세월을 정복할 수는 없는 법
 

샤흐리삽스로 가는 길.

대제국의 건설은 실크로드를 번성시켜 사마르칸트도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다. 러시아ㆍ인도ㆍ중국ㆍ타타르 등지에서 엄청난 상품들이 들어와 상품판매장이 모자랄 정도였다. 티무르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바자르를 건설했다. 당시의 바자르는 사라졌지만, 오늘도 새로운 바자르에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티무르제국 시절 오가던 세계 최고ㆍ최상의 상품들이 아닌 야채와 과일 등 생필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 초원 거주민과 유목민의 전통에 뿌리를 뒀다. 그는 칭기즈칸이 개발한 군사기술의 대가이며, 군사ㆍ외교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는 적의 정치ㆍ경제ㆍ군사적 약점을 이용하거나 그의 목적에 부합하는 음모와 배신, 동맹 등 승리를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했다.

티무르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평화로운 시기에도 계절을 따라 말을 몰고 이동했다. 이때마다 아내와 첩 아홉 몇 중에서 몇몇 가솔은 꼭 챙겼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수도 사마르칸트의 궁전도 며칠만 머물었을 뿐, 도시 건너편 평원에 설치한 야영 천막에서 지냈다. 티무르의 몸에는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알라는 위대하다. 그는 하고자 하신다면 그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게 그 원인을 만들어주신다”

티무르는 정복전쟁을 하기 전에 항상 이같이 주장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전략과 전술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는 70세에도 아랑곳없이 명나라 정복 길에 오른다. 그러나 제왕도 세월을 정복할 수는 없는 법. 원정 도중 오트라르에서 병사한다. 고향에 묻히길 원했던 유언과는 다르게 그는 ‘지배자의 무덤’인 사마르칸트의 구르 에미르에 묻혔다.

지배자의 무덤
 

티무르 동상.

구르 에미르는 티무르가 사마르칸트에 열정을 쏟아 부은 것처럼 사마르칸트에서도 한층 더 푸름이 돋보이는 장대한 건축물이다. 하늘색 터키옥과 금, 석회석, 모자이크로 장식된 구르 에미르는 훗날 아들 샤 루흐와 그의 아들 울루그벡이 자리를 잡아 티무르의 가족무덤이 됐다. 금 5kg이 사용된 구르 에미르의 내부는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거대한 기하학 무늬가 그려진 팔각형 바닥 위에 원통형 기둥이 마치 거대한 유르트처럼 둥근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64겹 물결모양의 무늬는 금빛으로 빛난다.

흑록색 연옥의 아미르 티무르의 관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스승의 관이, 오른쪽에는 무함마드 술탄, 앞쪽에는 울루그벡, 왼쪽에는 아들 샤 루흐의 무덤이 놓여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도굴을 의식해 만든 빈 관이다. 실제 무덤은 지하 4m 묘실에 있다. 뒤쪽 지하로 통하는 작은 입구를 들어가니 위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 관이 배치돼있다.

1941년 6월 22일, 옛 소련 고고학자들이 티무르의 무덤을 발굴했다. 이 발굴조사에서 티무르의 오른쪽 다리가 부자유스러웠다는 것과 울루그벡은 목이 잘려 사망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티무르의 관에 “내가 이 관으로부터 나갈 때 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는 글귀가 있었는데, 무덤 발굴 몇 시간 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기엔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티무르 일가의 무덤인 구르 에미르.

 

구르 에미르 내부. 가운데가 티무르의 묘.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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