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말 (8)
나혜석의 ‘김우영 초상화’와 ‘화령전 작약’

김우영 초상화 | 1928년 무렵 | 수원아이파크시립미술관.

요즘 남자의 모습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이 그림은 100여 년 전 남자의 초상화다. 잘 빗어 넘긴 머리, 차려입은 옷, 양복 주머니에 꽂힌 만년필이 그의 학식과 경제력을 말해준다. 전체적으로 유한 인상이지만 꽉 다문 입술과 두드러진 광대가 고집스럽게 보인다. 1928년 무렵 나혜석이 그린 그녀의 남편 김우영이다.

세계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두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한다. 여행경비를 많이 지출한데다가 귀국 후 그가 빨리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산 동래에 있는 시가에서 머물고 그는 서울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느라, 둘은 떨어져있었다. 여행 후, 제대로 된 선물을 받지 못한 시댁 식구들의 불만이 핍박으로 돌아왔다. 세계여행까지 하고 왔으니 돈이 많이 있을 걸로 짐작해 시어머니, 시누이, 시삼촌, 시사촌 줄줄이 그녀에게 얹혀 괴롭혔다. 그녀가 경제적 어려움을 털어놓은 날에는 집안에 큰 분란이 났다. 게다가 남편은 돈 많은 기생과 가까이 지내며 이혼을 여기저기 타진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시댁 식구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외로웠다. 최린에게 편지를 썼다. 경제적으로 도와달라는 말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이게 결국 와전돼 남편의 귀에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자식들을 위해 이혼만은 말자고 애원했으나, 그의 품에는 이미 다른 여자가 있었다. 결국 이혼했다.

그녀에게 달콤한 약속들을 쏟아내던 최린도 등을 돌렸다. 그녀는 그를 상대로 ‘정조유린죄’ 명목으로 소송을 걸었다. 그 때문에 모든 걸 잃은 그녀와 반대로 그는 친일에 적극 가담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니 그녀로선 분할 수밖에. 그녀는 뭐라도 해서 작은 타격이라도 주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약간의 합의금을 받았으나 세간의 조롱거리가 돼 끝없이 추락했다. 최린은 끄떡없었다.

최린을 만났을 무렵 그린 이 그림은 그녀의 마음이 남편에게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니면 최소한 남편에게 충실하고자했던 노력 같은 것일 수도. 싫어하는 사람을 이토록 단정하고 잘 포장해 그릴 리 있는가. 흔들리고 있지만 균형추를 맞추려는 그녀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자화상과 그의 초상화를 같은 시기에 같은 크기로 비슷한 색감으로 그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혼 후 그녀는 그림으로 재기하려고 노력했다.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화가촌’과 ‘어린이’ 등을 출품해 입선했고, 이듬해에는 ‘정원’을 출품해 특선을 차지했다. 특히 이 작품으로 일본 제전(帝展)에서도 입선해 인정받는 듯했다. 하지만 주홍글씨가 찍힌 그녀에게 사회는 가혹했다. 몇 차례 전시를 열었지만 대중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몇 군데 글을 기고하며 근근이 생활했다.

‘정조란 그저 취미다. 배고프면 밥을 먹듯이 사랑하면 육체적인 것은 자연스럽다’고 한 그녀의 말은 그 시대가 품기엔 너무 앞선 표현이었다. 동조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도 똑같이 헤프고 정욕에 눈이 멀어 몸을 아무렇게나 굴리는 천박한 사람으로 취급당할지 모르는 공포감에 다들 말의 본질을 보려하지 않았다. 순결찬양, 고상 우선주위는 고결한 사람의 필수요건이라 여겼으니까. 1934년, 그녀는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썼다. 남편을 만나기까지 과정과 세계일주 여행, 최린과 연예, 그리고 이혼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뿐 아니라 봉건적인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다음은 그녀가 쓴 글의 한 구절이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중략)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나는 모든 것에 정면승부를 거는 그녀의 용기와 솔직함에 탄복한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가 아닌가를 논하기 이전에 그녀의 굴하지 않는 그 정신세계 말이다. 배려라는 가면 뒤에서 남 눈치 보며 전전긍긍하는 나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그 경지. 아마도 이 강직함이 그녀가 끝까지 친일을 하지 않은 원천이지 않았을까. 그녀의 남편 김우영과 연인이었던 최린은 친일로 돌아서 호의호식했다. 일본은 그녀에게 재기의 발판을 약속하며 개명과 친일관련 강의나 글을 제의했으나 ‘내가 참여해야할 이유가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설사 거리로 나아 앉게 될지언정.

사람들은 그녀에게, 이런 점은 ‘페미니스트의 선각자다’ 혹은 이런 점은 ‘페미니스트로서 한계다’라고 가져다 붙인다.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시종일관 “여자도 사람이다”라고 소리쳤건만. 선각자도 한계자도 아닌 ‘여자 사람’의 울부짖음이다.

‘四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나혜석의 시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중에서)

화령전 작약 | 1935 | 호암미술관.

이혼과 사회적 냉대에 지친 그녀는 고향 수원으로 왔다. 집과 가까운 화령전과 서호, 화성을 찾아 그림을 그렸다. 당시 대표적 작품의 하나가 ‘화령전 작약’(1935)이다. 화령전은 정조대왕 사당이다.

사람에게 지친 경우 위로받을 곳은 자연뿐이다. 야수파나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지점이 어딘지를 논하는 게 무의미하다. 아름다워서 슬픈 이 그림은 A4용지만한 작은 그림이다. 그녀의 서사를 알고 있는 나는 그래서 이 그림이 섧다. 이 작은 나무판을 앞에 두고 꽃잎 하나하나를 그리며 흘렸을 눈물과 한숨의 깊이를 감히 짐작하는 까닭이다. 구름사이로 빛이 환하고 꽃들은 빛을 향해 있다. 그녀를 환하게 비춰줄 빛을 갈구하는 마음이었을까. 평온한 풍경을 그리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을 테지. 그녀는 수원화성이 로마성보다 로맨틱하고 그림을 그릴만한 곳이라고 지인에게 보낸 엽서에 쓸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다.

먹고살기 위해 세운 미술 아카데미도 실패하고 전시도 실패, 이 와중에 열두 살 큰아들이 폐렴에 걸려 죽었다. 화실에 불이나 그린 그림도 거의 소실됐다. 그 충격으로 실어증과 파킨슨병에 걸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됐다. 요양원을 전전하던 그녀는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49년 3월 14일, 관보에 무연고 시신을 찾아가라는 광고가 실렸다.

[1948년 12월 10일 서울 원효로의 시립자제원에서 한 행려병자가 눈을 감았다. ‘신원미상, 무연고자, 사망원인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 추정연령 65~66세’] 그녀의 나이 53세였다.

참고 :  ‘나혜석, 글쓰는 여자의 탄생(민음사)’
         ‘조선 여성 첫 세계일주기(가갸날)’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작품집(ESSAY)’
         ‘근대인의 삶과 꿈(호암미술관)’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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