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인천 개항장 근대문화유산 활용방안 1. 인천 개항장의 역사

제물포와 강화도조약

1897년 개항 초기 제물포의 모습 (사진제공·인천항만공사).

인천의 역사는 개항의 역사와 떼어놓을 수 없다. 인천항의 옛 지명이었던 제물포는 현재 인천 중구 지역의 조그만 포구로 예로부터 연안 도서와 육지를 잇는 역할을 해왔다. 고려시대에는 개경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발전했으나,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침체기로 접어들었다. 조선이 중국 명나라와 같이 바다를 봉쇄하는 해금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인천의 항구와 포구들은 기능을 상실하고 평범한 농어촌으로 변했다.

그러다 조선 후기 서해안과 한강하구 지역에 중국과 일본을 왕래ㆍ무역하던 이양선(통상을 요구한 미국ㆍ독일ㆍ프랑스ㆍ영국 등의 함선)이 나타나자, 제물포를 포함한 인천 일대엔 포대가 설치됐고, 해양방어진지로 변모했다.

조선의 문호 개방을 호시탐탐 노리며 1875년 운요호사건을 계획적으로 도발했던 일본은 이를 구실로 1876년 2월 조선을 함포사격으로 위협하며 개항 조약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게 했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다. 부산ㆍ원산ㆍ인천 등 3개 항구의 개방, 일본인 범죄에 대한 영사재판권 허용, 조선 연해에 대한 자유로운 측량과 지도 작성 보장 등, 일본인이 조선에서 누릴 권리만 담긴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의 길을 열어줬다.

강화도조약으로 제물포는 1883년 1월부터 강제로개항됐다.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제물포를 개항장으로 선택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나부사는 서해안을 세 차례에 걸쳐 정밀하게 탐사한 후 “월미도 부근은 여러 섬으로 둘러싸여 풍랑으로부터 안전한 자연항이며, 제물포와 월미도 사이에 두 길 깊이의 수로가 형성돼있어 간조 시에도 작은 배들이 왕래할 수 있고, 부두와 축항시설의 설치가 용이한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가장 큰 장점은 한양(서울)과 가깝다는 점이었다.

한적한 어촌이었던 제물포는 개항으로 근대 식민도시로, 국제항구도시로 급속히 변모했다. 개항하던 해 제물포에는 근대적 무역 업무를 처리하는 감리서와 해관이 설치됐다. 또한 일본인과 청국(중국)인, 서구인(영국ㆍ러시아인 등)들의 거주 지역(조계)이 들어섰다.

개항한 해 이 지역에 일본인이 348명 이주한 후 1885년 562명, 1890년 1616명으로 계속 늘었다. 중국인은 1890년부터 계속 이주했고, 서구인들도 이주하면서 제물포는 국제도시가 됐다. 1905년에는 조선인이 1만 866명에 불과했지만, 일본인 1만 2711명, 중국인 2274명, 서구인 50여명이 거주할 정도였다.

제물포에서 인천항으로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의 현재 모습.

제물포의 명칭은 점차 인천항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인천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각했다. 항구 주변에조계가 들어선 데 이어, 수출입 화물의 관세 사무행정을 담당할 인천해관, 인천감리서, 인천경찰서, 인천우체국 등 관공서도 설치됐다. 일본영사관을 비롯한 각국 영사관도 차례로 설치됐다.

여러 국가의 상사와 상인들이 진출해 경쟁적으로 상업 활동을 전개했고, 조선인들은 객주회 또는 신상협회를 결성해 상업 활동을 했다. 하지만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뒤 인천항의 상업활동은 일본인이 주도했다.

1883년 서울에 설치됐던 전환국(상설 조폐기관)이 제조기술의 부족과 재료조달의 어려움 등으로 1892년에 인천항 근처로 이전했다. 이후 1899년에 경인철도가 완공돼 화물운송이 편리해지자 전환국은 다시 서울 용산으로 이전했다.

전환국과 함께 일본의 은행이 많이 들어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금융기관인 일본 제1은행 부산지점이 1878년 설립된 데 이어, 인천엔 1883년 일본 제1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가 들어섰다. 1890년 10월에는 나가사키에 본점이 있는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 1892년에는 오사카에 본점이 있는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이 생겼다. 개항으로 인해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종교ㆍ교육ㆍ위락 등 여러 방면에 새로운 문화가 흘러들었고, 시민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종교로는 미국의 감리교가 1884년 6월 일본에서 활동 중인 로버트 사무엘 맥클레이를 시작으로 조선에 선교사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인천에 선교사가 늘어나자 선교사 숙소도 생겼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는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선교를 목적으로 인천에 상륙했다. 이들이 상륙한 때로부터 100년이 지나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탑이 세워졌다. 같은 해 7월 19일 아펜젤러 목사는 내리교회의 모태가 되는 종교집회를 진행했다.

1885년에는 인천 최초의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가 생겼고, 1888년 7월에는 성바오로수녀회 수녀 4명이 인천항에 도착했다. 1889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발렘 신부가 제물포성당을 창설했다. 제물포성당은 나중에 답동성당이 됐다. 1893년에는 답동성당 안에 성바오로수년원이 설립됐다.

1890년 9월에는 영국 해군 종군신부 코프 주교와 랜디스 의사가 선교와 의료 활동을 위해 인천항에 왔고 1891년 4월에 성미카엘교회를 지었다. 이 교회는 내동교회의 전신이다.

중국인들은 1893년 의선당을 설립했다. 의선당은 중국 산동성에서 건너온 중국인들의 교화기관으로건립된 사원이다.

종교시설과 함께 관립학교ㆍ사립학교ㆍ미션학교 등 교육기관이 많이 들어서 일본인ㆍ중국인뿐 아니라 조선인까지, 다양한 학생들을 교육했다. 현재 신흥초등학교의 전신인 인천공립심상소학교는 1885년 개교했다. 초기에는 동본원사의 승려들이 일본인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시작한 학교다.

1900년 9월에는 현 가톨릭회관 자리에 가톨릭 신자들과 빈민 자녀를 대상으로 전도와 초급과정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학교가 들어섰다. 이름은 인천항사립박문학교로 지금의 박문초교로 이어진다.

1901년 4월에는 중국인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한 인천화교소학교 들어섰다. 1908년 4월에는 재봉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3년제 인천여자실과학교도 개교했다.

개항장 일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을 비롯해 일본식 호텔인 이태호텔, 극장 ‘표관’, 중국음식점 ‘공화춘’, 외국인 사교클럽 ‘제물포구락부’, 서양요리와 커피ㆍ맥주ㆍ양주를 파는 카페 ‘금파’ 등, 많은 위락시설들도 생겼다.

일본 병참기지에서 서해안 대표 무역항으로

개항이후 조성된 중구 중앙동 2가의 1910년도 풍경.(출처·2002년도 인천광역시사)

1910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인천은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중공업과 군수산업 중심으로 재편됐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해변매립ㆍ도로확장ㆍ행정구역확대가 진행됐다.

이 기간 중 인천항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선박이 해수 높이와 상관없이 출입이 가능하게 이중 갑문식 선거 설비공사를 1911년 착공해 1923년 완공한 것이다. 제1독(dock)이 이때 완공됐고, 이에 따라 인천항이 근대적 항만으로서 기능을 하게 됐다.

인천항은 2000톤급 기선 5척이 동시에 계류할 수 있게 규모가 커졌고, 이용 선박도 많이 늘었다. 1920년대 인천은 인구 4만명에, 무역액이 1억원에 달하는 거대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사변과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면서 인천항은 일본의 병참기지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에는 인천항의 수입항 기능이 커지며 성장하는 듯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항만시설이 대부분 파괴되며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수출입 화물이 크게 늘어나 물동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정부는 인천 내항 일대를 모두 독(dock)화 하기로 했고, 1974년 제2독(dock)을 완성하며 명실상부한 서해안의 대표 무역항이 됐다.

이후 인천항은 1980~90년대를 거치며 부두와 선석이 증설됐고, 항구의 설비는 점차 첨단화됐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며 평택과 당진 등이 서해안의 주요 항구로 떠오르면서 인천항은 다시 변화의 기로에 서게 됐다.

중앙동 2가의 현재 풍경.

[참고 자료] 인천항만공사 발간‘인천항사’, 인천문화재단 발간‘일곱 테마로 떠나는 개항장 답사’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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