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19. 황금 세공의 길목, 쿠와(Kuwa)

세로줄무늬 비단

잡초 밭으로 변한 쿠와 불교 사원 터 전경.

페르가나는 우즈베키스탄 서쪽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다. 시내에서 북쪽으로 20㎞ 떨어진 곳에는 마르길란시가 있다. 이곳은 고대 페르가나의 중심 지역이었다. 주변을 흐르는 시르다리야가 풍요로운 오아시스를 만들어줬고, 사막을 건너 온 실크로드 상인들은 이곳에서 교역과 휴식을 병행했다. 이 도시는 10세기부터 시작한 양잠과 견직물로 유명하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지금도 우즈베키스탄의 최대 견직물 공장이 있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하는 비단은 빛에 따라 색이 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로줄무늬 비단은 중앙아시아 전통문양이기도 한데 색체의 화려함으로 인해 더욱 이국적이고 아름답게 보인다.

비단은 고대 중국에서 생산하는 귀중품이었다. 가볍고 부드러우며 광택과 염색성이 뛰어나 순식간에 서구인들을 사로잡았다. 비단은 서역 국가들과의 교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략물품이자 무기가 됐다. 특히, 한나라 때의 비단은 금값과 맞먹을 정도였는데 ‘한금(漢錦)’으로 불리며 서역에 본격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왕오천축국전’ 속 페르가나

쿠와 유적지 입구에 있는 아흐마드 알 파르고니 동상.

8세기 초, 중국 유학을 마친 혜초는 천축국인 인도를 순례한다. 그리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장안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이곳 페르가나 지역을 지난다. 혜초는 인도 순례를 마치고 ‘왕오천축국전’을 지었다. 이 책은 8세기 페르가나를 비롯해 중앙아시아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강국에서 동쪽은 발하나국(=페르가나)인데, 왕이 두 사람 있다. 시르다리야라는 큰 강이 한복판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간다. 강 남쪽에 있는 왕은 대식에 예속돼있고, 강 북쪽에 있는 왕은 돌궐의 관할 하에 있다. (중략) 언어는 각별해 다른 나라와 같지 않으며, 불법(佛法)을 알지 못한다. 절도 없고 승려도 없다”

중앙아시아는 8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시르다리야를 경계로 남쪽은 아랍의 우마이야왕조가, 북쪽은 서돌궐의 돌기시가 지배했다. 두 지역 모두 불교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혜초는 이러한 지역에도 불교국가가 있다는 놀라운 정보를 알려준다.

“발하나국 동쪽에 나라가 하나 있는데 골탈국이라고 부른다. 이 나라 왕은 원래 돌궐 종족 출신이고, 이곳 백성의 반은 호족이고 반은 돌궐족이다. (중략) 왕과 수령, 백성들은 삼보(三寶)를 믿는다. 절과 승려가 있으며, 소승법이 행해진다”

불교국가 골탈국과 쿠와(Kuwa)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 조사원들.

혜초가 알려준 불교국가 골탈국은 어디일까. 페르가나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곳에 ‘쿠와(Kuwa)’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이곳에는 불교 사원이 많고 유물도 다량 출토됐다. 이곳이 혜초가 이야기 한 ‘골탈국’일 가능성이 높다.

쿠와는 소그드어로 ‘꽃 핀 거리’라는 뜻이다. 페르가나 계곡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시르다리야 북부지역의 중심이 아크쉬켄트(Aksikent)라면, 남부지역의 중심은 쿠와였다. 특히, 쿠와는 수많은 실크로드 중 황금 세공 교역이 이뤄지는 길목에 위치한다. 그래서 당시에는 “쿠와의 왕이 되면 모든 페르가나를 지배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실크로드 무역의 중추는 소그드인들이 담당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이익이 남는다면 어느 곳이든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에도 개방적이었다. 불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실크로드 무역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상인정신이 우선시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종교도 무역의 수단인 것이다. 그들의 개방적 종교관은 여타 종교의 전파를 훨씬 수월하게 했다. 중앙아시아에 불교가 성행하고, 중국에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가 전해진 것도 이들 때문이었다.

천문학자 아흐마드 알 파르고니

중앙아시아 전통문양의 비단 옷을 입고 있는 소녀.

쿠와 유적지에 도착하니 유적지는 보이지 않고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10세기에 이곳에서 태어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흐마드 알 파르고니다. 그는 일식과 수심을 측정하는 기계를 만들고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11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돼 유럽에 알려졌다. 13세기에는 세계의 주요 언어로 번역돼 소개될 정도였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도 파르고니의 주장에서 힘을 얻어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리라.

우즈베크어로 페르가나는 ‘파르고나’다. 파르고니의 이름을 도시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파르고니 동상이 있는 광장을 넘어서니 쿠와 유적지가 펼쳐진다. 유적지는 폐허인 채 잡초만 무성하다. 유적지 한 귀퉁이에서는 젊은 고고학도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그들의 노력으로 바미얀 대불 다음으로 큰 불두(佛頭)가 발굴됐다고 한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다

쿠와는 기원전 1세기 무렵 도시로 형성되고 5세기에 번성했다. 혜초 스님이 다녀간 8세기 초에는 불교가 성행했다. 당시 이 넓은 들판은 불교 사원으로 촘촘했을 텐데, 지금은 이름 모를 풀들만 그날이 그리운 듯 발목을 부여잡는다. 번성했던 유적은 흔적 없고 먼지뿐인 폐허에서 혜초를 떠올린다. 이 시대에 혜초가 이곳을 지난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달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만 너울너울 휘돌아가네.
가는 편에 편지 한 통 부치려 하지만
바람은 급하고 화답은 없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는데
몸은 남의 나라 서쪽 모퉁이에 있네.
따뜻한 남쪽은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내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쿠와에서 발굴된 불두상.

8세기 후반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이 이곳을 점령했다. 불교 사원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일 것이다. 그들이 건설한 이슬람 건축물 역시 칭기즈칸의 침략 때 폐허가 됐다. 모든 것은 시간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언제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곧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요 세상사의 사필귀정인 것이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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